태화강대공원 코스모스 바다에서 만난 시인들
태화강대공원 코스모스 바다에서 만난 시인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2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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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가 고향인 시인 윤동주는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고 했다. 또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서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져 서로 둘 다 순수해진다”고도 했다.

이해인 수녀는 여류시인의 감성으로 코스모스를 다음과 같이 그려냈다.

“몸 달아 기다리다/ 피어오른 숨결// 오시리라 믿었더니/ 오시리라 믿었더니// 눈물로 무늬진/ 연분홍 옷고름/ 남겨 주신 노래는// 아직도 맑은 이슬/ 곱게 머리 빗고/ 고개 숙이면/ 바람 부는 가을 길/ 노을이 탄다.”

정연복 시인은 코스모스를 닮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시어에 담았다. 삶에 대한 의지가 듬뿍 묻어나 있다.

“코스모스처럼/ 명랑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순하게// 코스모스처럼/ 다정다감하게// 코스모스처럼/ 단아(端雅)하게// 코스모스처럼/ 가볍게// 세월의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코스모스처럼 꺾일 듯 꺾이지 않으며…”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은 딱히 코스모스는 아니다. 하지만 기나긴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면 피어나는 가냘픈 코스모스가 연상 작용을 일으키며 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을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올여름은 가뭄이 그렇게도 길고 길어 코스모스 농사는 접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던히도 흔들렸었다. 물 없이는 세상 만물에 생명을 줄 수 없기에 코스모스도 피지 않고 가을도 오지 않으려니 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너무나도 참담했다. 설상가상으로 잡초까지 코스모스를 뒤덮어 다 녹아져 없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봉사인력까지 품앗이를 해 준 덕분에 그야말로 ‘흔들리면서도’ 곧게 줄기를 세워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찔끔거리며 애태우던 비도 9월에 접어들더니 100mm나 흡족하게 내렸다. 신기하게도 태화강대공원 코스모스들은 마지막 생명의 빛들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바람과 비에 흠뻑 젖으면서도 꽃잎들을 따뜻하게 피워냈다.

지금은 수많은 꽃망울로 되살아나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면서 가뭄과 잡초와 언제 싸웠냐는 듯 배시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고맙고 감사하고 반갑고 행복하다. 한편 얄밉기도 하다.

홍성숙 시인이 말하는 코스모스이기에,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기에, 시련은 아름다운 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젖기도 한다.

“아무도 그녀를 가질 수 없는 이유/ 세상이 내 것이라 당당히/ 우주의 이마에 입맞춤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바람 앞에/ 입술을 툴툴거릴 수 없는 까닭/ 그 여린 허리를 흐느적거리며/ 그 큰 가을을 휘어잡기 때문이다.// 누가 우주의 입술을/ 그 누가 우주의 배꼽을/ 신의 가장 약한 손길이라고 할까// 다듬고 더듬고 다독거리는/ 가을의 또 다른 풍차가/ 우주의 시계바늘을 참 잘도 돌린다./ 우리는 또 그 속에/ 덤으로, 덤으로 신의 덤으로”

이미 138억 년 전 빅뱅에 의해 우주가 시작될 때부터 코스모스는 꽃이 아닌 온 우주였을지 모른다. 오늘도 우리는 우주의 시간에 맞춰 이 가을에 사로잡히고, 태화강대공원에 피어나는 수많은 우주의 배꼽에 빠져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주용 울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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