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사라진 울산소금, 그 맛을 보고 싶다
[이정호칼럼]사라진 울산소금, 그 맛을 보고 싶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2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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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생활의 필수품이었다. 사람의 체액과 혈청 등에는 0.9% 정도의 염분이 들어있다. 그 염분이 위장 기능을 돕고, 심장과 신장 기능을 강화시킨다. 해독과 살균, 해열과 지혈에도 작용하며 신진대사, 혈관 정화, 적혈구 생성 등에도 기여한다. 수렵 위주의 원시시대에는 소금의 중요성이 좀 낮았다. 고기에 기본적인 염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경시대에는 소금이 반드시 필요했다. 조미료 측면과 식품의 저장성 면에서 소금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며, 소량이지만 소금을 약으로도 사용했다.

이렇듯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농경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에 터를 잡은 우리 조상들은 바닷가에서 소금을 얻었다. 고조선시대에는 랴오닝성에 면한 바닷가에서 자염(煮鹽)을 생산했다. 백제와 신라는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소금을 얻었으며, 고구려는 함경도 쪽의 옥저에서 조공으로 바친 소금을 사용했다. 고려 때는 귀족층에서 소금을 매점매석하자 조정에서 생산과 유통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공염분에서 소금을 생산해 조정에 공납했으나 후기로 넘어올수록 사염분 생산 비율이 높아졌다.

그런 역사 속에 울산소금이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소금은 바닷물을 농축시킨 함수를 끓여서 만든 자염이었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에서는 둑을 쌓지 않는 무제염전이었으나 울산은 둑을 쌓아서 바닷물을 가둔 유제염전이었다. 바닷물을 농축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모래와 갯벌의 비율이나 땔감 등에서도 지방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동해안의 경우 갯벌이 없는 지역에서는 산에서 옮겨온 황토를 모래와 섞어서 갯벌을 대신했다. 1907년에 일본에서 처음 건너온 천일제염법과는 달리 우리 소금은 달이고 볶는 전오(煎熬)제염법이었다.

울산의 염전은 모두 7곳으로 나타난다. 삼산염전, 돋질·조개섬염전, 명촌·대도섬염전, 외황강 마채염전이 그것이고, 서생포, 부곡 사평, 장생포 고사에는 염전보다 규모가 작은 ‘염분개’가 있었다. 우리 전통의 전오제염과 천일제염이 1960년대 초까지는 병행하여 생산되었다. 염전만 있으면 생산되는 천일염의 대량생산에 비해 엄청난 땔감과 고된 노동력이 필요했던 자염(토염)은 비용 차이가 엄청나게 났다. 그리하여 우리 전통 소금은 60년대 중반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천일염이 우리나라 소금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울산은 조선시대까지는 소금 생산의 주요 지역이었다. 김해 명지소금, 포항 송도염전, 서해안의 고창·태안·인천염전과 더불어 울산염전도 매우 중요한 소금 생산지였다. 북한 땅에도 대규모 염전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울산소금의 주된 생산지였던 삼산염전은 일제강점기에 비행장이 1929년에 들어서면서 많이 축소되었다. 그런 삼산염전이 1934년 통계에 3만6천 평이나 되었다. 그밖에 명촌·대도섬 3천 평, 조개섬 3천650평, 청량 마채 5천500평을 합해 울산염전 면적은 총 4만8천150평이었다.

울산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나름 특징이 있었다. 논과 비슷한 소금밭 가장자리에 바닷물이 유입되는 40cm 가량의 물길을 낸다. 이 바닷물이 갯벌과 모래를 배합한 염전에 들어오면 수분 증발을 위해 소와 인부들이 써레질을 하고, 다시 바닥을 판판하게 고른 후 또 그 위에 짠물이 흠뻑 젖도록 뿌려 준다. 이러한 과정이 극한 작업이지만 5,6일은 되풀이해야만 했다. 이런 작업의 결과로 얻어진 염수가 20도 가량 되면 넓적한 가마솥에 넣어서 몇날 며칠을 마른 솔가지인 ‘소깝’을 조절해가며 달인 끝에 소금이 얻어지는 것이었다.

우리 소금의 이동경로는 주로 뱃길이었다. 그러나 뱃길이 없던 울산소금은 모두 소금장수들의 등에 업혀서 운반되었다. 그 무거운 소금을 지게에 지고 대로를 따라, 혹은 고개 넘고 재를 넘어 내륙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그 지게에 두부 만들 때의 필수품인 간수와 미역도 따라갔다. 그런 소금이 밀양으로, 청도로, 장터에서 장터로 옮겨가면서 문경새재와 추풍령까지 올라갔다. 1930년대 철도 개통 이후부터는 울산소금이 날개를 달았다. 울산 최후의 마채염전 소금은 덕하 소말똥 아지매들에 의해 머리에 이고지고 가까이는 부산과 영천, 멀리는 단양까지 갔다.

울산의 염전은 1960년대 중반 마채염전을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삼산염전은 해방 전에, 명촌·대도섬 염전은 사라호 태풍 때 사라졌다. 조개섬염전은 울산공단이 조성되던 1960년대 초반에 폐전되었다. 대신 1979년에 한국 유일의 소금공장이 마채염전 터에 들어섰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우리 전통 염전이 문을 닫은 이유는 과도한 생산비용 때문이다. 그런데 수년전부터 우리 전통 소금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현재 태안과 울진에서 자염이 생산되고 있다. 언젠가 울산 자염이 부활하면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반찬 맛들이 되살아나지 싶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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