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도공 기리는 기념관을 서생포왜성에”
“선조도공 기리는 기념관을 서생포왜성에”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09.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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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도예협회의 맏형 황인호 도예가
▲ 울산도예협회의 황인호 도예가

부부도예가 4쌍 ‘한빛갤러리’서 창립도예전

도예가(陶藝家) 부부들이 ‘울산도예협회’란 이름 아래 다시 뭉쳤다. 10여년만의 재결합이다. 변화라면 ‘정관’이 새로 생기고 회원이 3쌍에서 5쌍으로 늘어난 점이다.

정관 규정에 따라 회장직에 김경훈 씨, 사무국장직에 황현조 씨를 추대했다. 초기 회원인 김경훈-한진안(한진안도예), 황수길-조희숙(운흥요), 황인호-박향자(홍우도예) 부부가 차려놓은 밥상에 황현조-연지원(보담도예), 배도인-이연홍(배도예인) 부부가 숟가락 하나씩 뒤늦게 얹은 셈이 됐다. 정관 제4조(사업)에 따라 작품전부터 열고 기획사업 ‘대한민국 선조도공(先祖陶工) 기념관 건립’도 군불을 지피기로 했다.

기획사업을 추진하는 김에 울타리도 넓히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부부’가 아닌 도예가에게도 자격을 주기로 한 것이다. 40~50명으로 추산되는 지역 도예가 가운데 부부가 같은 길을 걷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창립전시회 성격의 작품전에 ‘2017 한빛갤러리 초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울주군청에서 가까운 남구 옥동 ‘한빛치과’에서 건물 2층의 아담한 갤러리를 선뜻 제공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했다. 전시기간은 9월 19일~10월 13일. 부부회원 5쌍 가운데 짬 내기 힘든 막내 1쌍(배도인-이연홍 부부)만 빼고 4쌍이 출품작을 준비했다. 내친김에 ‘선조도공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구성에도 속도를 내기로 했다.

서진길 선생 “울산도예가, 분청정신 알아야”

‘초대전 오프닝’ 나흘 전(9월 15일) 점심나절, 울산문예회관 ‘쉼터’에 출품 준비로 바쁜 남정네 도예가 넷이 모였다. 울산의 원로사진작가 서진길 선생도 자리를 같이했다. ‘선조도공 기념관 건립’에 대한 조언도 듣고 ‘추진위원’으로도 모실까 해서였다.

원로작가가 말문을 열었다. “울산사람이라면 ‘충의사’부터 알아야 하고, 울산서 도자기 한다면 ‘분청정신’부터 가져야 해. 청자(靑瓷)의 중심이 강진, 백자(白磁)의 중심이 이천이라면 분청(粉靑)의 중심은 울산이기 때문이지. ‘천황산 요지군’(=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조선 중기의 백자 가마터 6기가 있다.) 하면 가장 오래된 분청 요지(窯址)이고, 학계에서도 제일 먼저 밝혀낸 곳 아닌가? 그런데도 왜 이용을 안 해?”

‘분청 정신’을 그는 몇 번이고 강조했다. “임란 때 왜군이 그냥 땅 뺏으러 온 게 아니야. 육군 1개 중대가 밀양을 거쳐 천황산 990고지로 쳐들어간 것은 요지 때문이었지.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찾아나가야 해. 1년에 한 번이라도 천황산 요지에 땀 뻘뻘 흘리고 올라가서 울산 흙으로 만든 울산 찻잔으로 차도 마셔보고….”

울산도공(蔚山陶工)의 후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2017 기획사업 취지’에 그런 표현이 있지 않던가? “본위원회(=’선조도공 기념관 건립 추진위’)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인 도자공예의 훌륭한 전통을 기반으로 역사적 사료와 ‘도자전쟁’이라 불리는 임진왜란의 아픈 기억과 더불어 선조도공의 발자취를 찾고 그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울산 서생포왜성에 일본으로 끌려간 선조도공의 기념비와 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울산도예협회’의 산하기관으로 둔다.”

추진위원으로 모시는 일은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협회의 맏형 격인 황인호 도예가(59·사진)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늘 새 출발을 알려드릴 겸 해서 자리를 만든 겁니다.”

부산 김해에 작업장을 가지고 있던 황 씨가 울산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84년의 일. 부름이 있었다. ‘남창’에서 ‘동광기와’를 하던 오세필 씨가 그를 불렀다. “금색 나는 황금기와를 구워 달라는 부탁이었지요. 저는 불 때는 일을 맡았고, 질 좋은 ‘방어진 점토’(=규사를 캐내고 남은 백토)를 갖다 썼는데, 그때 구운 황금기와를 단양 구인사에 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기와 일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이 그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아내 박향자(55)씨를 그 기와공장에서 만나 인연을 키울 수 있었던 것. 결혼에 성공한 그는 3년 후(1987년) 다시 남창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길이 남창 바닥에서 ‘홍우도예’란 간판을 달고 30년 붙박이로 눌러 살게 되는 길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울산 전역을 샅샅이 뒤졌지요. 그때만 해도 공방(工房) 개념의 작업장이 한 군데도 없습디다. 옛날 방식 그대로 분업화된 작업장이 한두 군데 있긴 했지만.”

황 씨는 ‘지훈 선생’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던 서양화가였다. 그 작업장의 ‘물레대장’은 가마에 불을 떼면서 물레도 돌리는 기능공이었고. 다시 그가 말을 이었다.

“30년 전만 해도 울산에 기와공장, 옹기공장은 있어도 도자기공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창중학교 근처 우리 동네에 기와공장이 다섯 군데 있었고, 옹기공장은 외고산마을 아홉 군데를 합쳐 열두 군데나 있었지만.”

황인호 씨에게는 자연스레 ‘울산 도예공방 1호’란 꼬리표가 달렸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40여 명을 헤아리게 됐으니, 이게 격세지감이란 건가!

 

▲ 창립전에 출품작을 낸 부부도예가 4쌍이 이달 초 울주군 웅촌면 황수길-조희숙 도예가의 작업장 ‘운흥요 ’에서 회동,기념사진을 찍었다.앞줄 오른쪽이 김경훈 회장,왼쪽이 황현조 사무국장.뒷줄은 오른쪽으로부터 한진안,황수길,조희숙,박향자,황인호,연지원 도예가.

“‘日 울산마치의 울산도공’ 흔적도 알아낼 것”

앞으로 할 일은 벅차고 가짓수도 많다. 울산도예협회 창립전은 회원들이 돌아가며 챙겨도 되겠지만 ‘선조도공 기념관 건립 사업’만큼은 조금도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일이다. ‘전문성’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그러자면, 서진길 선생 말마따나, 지금부터라도 도자유적(가마터)을 찾아내고 이야깃거리를 주워 담아야 한다. 선조도공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가는 일도 가마 군불 떼는 작업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대화가 깊이를 더해 가는 사이 황인호 씨가 머리에 떠오른 구상의 매듭을 조금씩 풀어헤쳐 보인다.

“한삼건 교수 글을 읽고 알았는데, 일본 구마모토에 가면 임진왜란 때 울산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이 집단으로 살던 ‘울산마치(蔚山町)’라는 데가 있었다고 그러지요.”

참고로, ‘위키백과’에 따르면 ‘울산마치’는 지금도 전철역 이름에 남아있다. “역 이름인 ‘우루산마치’는 한국의 지명인 울산(蔚山)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조명(朝明) 연합군에 맞서 주둔했던 울산의 지명을 땄거나, 울산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정착시킨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역 주변의 주요시설에도 가토 기요마사를 받드는 ‘가토 신사’가 있다. 역사 내의 한국어 표기는 원래대로라면 “우루산마치(うるさんまち)”라고 해야 하나, 이 역만은 원래의 한국어 표기 ‘울산’에 맞춰 ‘울산마치’로 표기하고 있다.”

황 씨가 말을 다시 이어 갔다. “울산서 끌려간 도공이라면 그 전에 울산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선배도공들일 겁니다. 그분들의 발자취와 흔적도 울산서 힘닿는 대로 찾아 나서야겠지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회원들은 그래서 절실한 것이 전문가 도움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높이는 더 높아 보였다. 기념관에 울산의 선조도공만 모실 계획이 아니라는 것. 가능하다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누대에 걸쳐 일본에서 이름을 떨친 조선의 도공 이삼평(李參平), 심수관(沈壽官) 선생의 기념비도 같이 세워 업적을 기릴 참이다.

이 비중 있는 일은 앞으로 회원들이 나눠 맡아야 한다. 뜻을 같이하는 회원이 그래서 더 필요하다. 지금 열고 있는 ‘2017 한빛갤러리 초대전’도 실은 ‘존재감 부각’과 ‘회원 확충’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기대하는 이벤트다.

회원 확대 위해 ‘脫부부·동문의식’ 선언

전업 도예가들끼리 협회를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제의는 후배 그룹에서 먼저 나왔다. 올봄에 시작된 이야기가 양력 오뉴월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만나 술 한 잔씩 하면서 나눈 얘기에 서로 죽이 맞았던 거지요.”

의기투합에는 솔직히 ‘동문의식’도 제법 작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원으로 울산도예협회 가입한 부부도예가 10명 중 7명이 부산 초량동 시절의 ‘부산공예학교’(현 한국조형예술고등학교, 부산 용호동) 동문들이니까….

황인호 씨가 2회 졸업생으로 맏형이다. 그 뒤를 8회 황수길 씨, 12회 황현조 씨, 17회 배도인 씨가 잇고 있다. 운흥요의 조희숙 씨(11회)와 보담도예의 연지원 씨, 배도예인의 이연홍 씨도 기수만 다를 뿐 똑 같이 부산공예학교에서 솜씨를 갈고 닦은 ‘여류도공’들이다.

그러나 이미 합의한 것이 있다. ‘부부도예가 탈피’ ‘동문의식 탈피’ 선언이다. 기획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오직 외연 확장에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 ‘울산시에 사업장을 둔 전업 도예가’라면 누구든지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회비는 월 1만원.

“천황산 가마터에서 선조도공들의 애환도 우리가 앞장서서 달래 드릴 날이 머잖아 올 것을 확신합니다.” 울산 도예공방 1호 황인호 씨의 희망찬 장담이다.

글= 김정주 논설실장·사진= 정동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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