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편지]암해에 내리는 Secret Sunshine -만어사에서-
[길위의편지]암해에 내리는 Secret Sunshine -만어사에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25 2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운해 사이를 가르며 산으로 오른다. 어산불영(魚山佛影) 부처의 그림자도 사라지는 먹구름이 잔뜩 끼인 날, 검은 물고기 떼 등 위로 가을비가 내리친다. 얼마간 건조해 부석거리던 몸과 마음. 감물같은 비를 환호하는 고기들의 몸짓이 힘차다.

높고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밀양(密陽)은 한자로 빼곡한 밀(密)을 쓰지만 ‘비밀의 볕(Secret Sunshine)’로 번역되어 만들어진 영화도 있듯 신비스런 이미지가 연상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라가 어려울 때 땀을 흘리는 표충사의 비석이 있어 그렇고,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계곡 얼음골, 그리고 종소리가 나는 수만 암괴들이 바다를 이루는 웅장한 풍경을 가진 만어사(萬魚寺)가 있어 더욱 그렇다.

어느 봄날 매화꽃 향기 따라 여행하던 날이었다. 낙조가 물든 낙동강 삼랑진 철교를 따라 거슬러 오르다 우연히 들르게 된 절이 있었는데 사찰의 풍광이 너무도 인상적이고 신령스러웠다. 암해, 비가 내리는 날 물 속을 헤엄치는 검은 물고기들의 모습을 꼭 다시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만어사로 오를 수 있는 길은 여러 군데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밀양 단양면 고개를 넘어본 것인데 감추어진 아름다운 한 마을의 모습에 여러 번 발길을 멈추었다. 자고나면 짙어지는 황금빛, 켜켜이 계단으로 다랑이 논이 멋스러운 감물 마을이라고 한다. 물이 달아 감물이라는 마을이 연화봉 아래 동화처럼 안겨 있다. 전망 좋은 곳에 찻집이 하나 있어 내려오는 길 들러야지 하고 눈에 담아두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라는 것만으로도 귀해진 요즘, 물기 머금은 소나무향까지 오감이 상쾌하다. 돌고 돌아 구비 구비 나의 여행길은 목적지가 반이고 가는 길 위가 반이다. 아니 그 가는 길에 이렇듯 선물 같은 덤을 받는다면 더는 바라지도 않으니 길 위가 전부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가파른 고갯길을 헤쳐 눈앞에 검은 고기떼가 보이기 시작한다.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그렇듯 만어사(萬魚寺)도 많은 설화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동해 용왕이 아들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無隻山)의 신승(神僧)을 찾아가서 새로 살 곳을 부탁하였는데 신승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왕자가 머물 터라고 알려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바다 속 함께 살던 고기떼가 그의 뒤를 따른 것이었다. 인연이 닿아 이곳에 머물게 되었고 왕자는 큰 미륵돌로 변하였다. 따르던 고기들은 크고 작은 화석으로 굳어진 지금의 만어사를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는 전하고 있다.

그것 말고도 만어사는 45년 가락국 수로왕이 창건을 하고 일연의 흔적이 담긴 삼국유사의 어산불영(魚山佛影) 설화를 담고 있는 절이기도 하다. 고래만한 수만 마리의 물고기 떼가, 땅에서부터 수백 미터 절까지 머리를 들고 오르는 모습을 실제 본다면 그 어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다 초라해지고 말지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증명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어 인간은 두 손을 모은다, 신성이란 단어로.

검은 돌 위에 한 점으로 서서 겹겹 두른 산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 고개 숙여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를 염원하는 이, 작은 돌을 손에 쥐고 큰 바위를 두드리며 경쾌한 종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천년을 이어 드리워진 수많은 이들의 바램에 나도 먼지 한 톨 얹으며 후후 숨을 내쉬어 본다.

얼마 전 일본의 한 국보에 한국 사람이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 인터넷에 알려지면서 세계인의 눈총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안타깝게 이곳에도 그런 인간의 욕망은 쉬이 찾아볼 수 있다. 신성한 바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이름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사찰에서는 대를 이어 저주를 받으니 이름을 새기지 말라는 경고문까지 붙였다. 성과 속의 경계, 수천 년을 수만 년을 내리는 비라면 씻겨질까.

‘어서 오세요, 고운 분들이 오셨네요.’ 오르던 길목에 봐 두었던 찻집에 앉았다. 한적하고 고요한 산마을, 노랗게 익어가는 다랑이 논과 잘 어울리는 보랏빛 도라지 꽃차를 주문했다. 쑥차까지 덤으로 그득하게 담아내는 여인의 미소처럼 날이 개이고 산 고개에 무지개가 걸렸다. 빼곡히 채우는 빛 좋은 밀양, 그제야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마음에 두었던 무언가를 빌었다.

최영실 여행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