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지는 것도 이기는 거다
때론 지는 것도 이기는 거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1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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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고전문학 시간에 배웠던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는 아직 어렸던 내겐 다소 충격적이었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정치인이자 시인이었던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강가에서 어부를 만나 나눈 대화를 시로 쓴 것으로 결국은 이런 내용이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빨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된다.’ 굴원은 혼탁한 세상에서 홀로 맑고, 다 취해있는데 혼자 깨어 있다가 추방당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부가 해준 조언인 셈이다. 그래도 나름 순수했던 시절, 고려 말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보다는 충신인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가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때여서 굴원의 어부사는 어린 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하긴, 뭐.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주기적으로 봤던 시험에는 늘 답이 있었고, 그 후 만날 세상도 언제나 정답이 있을 거라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만난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자의 욕망은 ‘꿈’이나 ‘목표’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거기에 내 욕망까지 가세한 혼탁한 세상엔 정답은 찾기도 힘들지만 존재하는지조차 모호해져만 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8년작 <다크나이트>란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패한 고담시로 새로 부임한 청렴레벨 만랩의 검사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는 단번에 고담시를 부패시켜온 범죄자 절반 이상을 감옥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고담시의 시장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하비를 걱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마피아 뿐 아니라 정치인, 저널리스트, 경찰까지. 지갑이 얇아질 사람들은 모두 당신을 공격하게 될 거야.” 실제로 하비의 청소는 오히려 더 큰 범죄를 자극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게 된 하비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살인마로 전락하고 만다. ‘어부사’에서 어부인들 굴원에게 그런 조언을 하고 싶었을까. 세상은 맑을 때도, 혼탁할 때도 있기 마련이고, 어느 쪽이든 ‘계속’ 살아야 하지 않나.

2년치 노사협상이 밀려 신음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문득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어부사’의 한 구절이 떠오른 건 회사보다는 노조에 대한 답답함 때문이었다. 솔직히 노조의 억울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호황을 누리던 시절 소위 어용노조로 인해 임금이 동결된 건 엄연히 잘 알려진 사실이고, 불황이 닥친 지금 고전하는 건 회사경영진의 책임이 크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다. 그건 회사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불황인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면 호황기가 도래했을 때 곳간을 풀겠다는 보장도 했지 않나.

그래도 구조조정은 억울할 수 있는 만큼 그 동안 노조는 2년치 협상이 밀리면서 지금까지 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달라질 게 있나. 파업이 참여자수 저조로 힘을 받지 못하는데 뭘 하겠단 말인가. 끌면 끌수록 조합원들만 괴롭다. 옳음과 좋음은 다르다. 내가 깨끗하다고, 내 의지가 옳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그렇다. 지금 노조는 질 때인 것이다. 어찌 매번 이길 수만 있단 말인가. 세상은 맑을 때도, 흐릴 때도 있는 법이고, 사람의 일이란 이길 때도, 질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지금 패배를 인정한다고 꼭 진 것일까. 그럴 리가 있나. 전대미문의 2년 간의 투쟁은 기록으로 남을 거고, 향후 노조가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지는 또 누가 알겠는가. 포기도 용기가 필요하다. 또 당당하게 패배를 인정할수록 더 멋있기 마련이다. 언제든 이길 날이 올 수도 있기 때문. 그래서 때론 지는 것도 이기는 거다. 무엇보다 회사와 노조는 적이 아니라 한 배를 탄 동료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회사가 위기여서 힘을 합치기로 했다”는 좋은 명분도 있지 않나.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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