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깡·18번·쿠사리…
땡깡·18번·쿠사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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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익히 들은 말 중에 ‘땡깡’이란 게 있었다. 고집 센 아이가 분을 못 참고 생떼 부린다는 뜻을 지닌 말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이 요즘 돌림병처럼 중앙정가를 휩쓸고 다니고 있다니 자못 흥미롭다.

소리·소문을 종합하면, ‘땡깡’이란 말은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인준이 좌절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며칠 전 그 책임을 국민의당에 돌리며 쏟아낸 일종의 독설(毒說)이었다. 공식 자리에선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골목대장도 하지 않을 짓”이란 말이 비공개 의원총회에선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땡깡을 부린 집단’이란 말로 바뀌면서 국민의당 지도부의 심기를 된통 건드렸던 것. 추 대표의 입심은 과거 독설가로 이름났던 박희태 국회의원(전 국회의장)과의 맞장 뜨기에서 “KO승 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설에 대한 반응은 물으나마나였다.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가 분기 가득한 쓴 소리를 먼저 내뱉었다. “(추미애 대표가) ‘땡깡’이니 ‘골목대장’이니 시정잡배 수준의 망언과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같은 당 김관영 사무총장도 13일 전북도청서 열린 현장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말씀 거들었다.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 당분간 침묵해 주실 것을 정중히 권한다”고 비꼬았던 것. 정가에선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두 정당의 골 깊은 감정싸움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의 인준에도 먹구름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데 정작 더 큰 문제는 정치지도자들의 문제의식 부재에 있다. ‘땡깡’이란 낱말을 마구 사용하면서도 그게 왜 문제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MBN 시사 프로그램 출연자(패널)들 사이에 이 용어가 화두로 떠올랐다. 13일자 ‘채인택 국제전문기자의 미시세계사’(중앙일보)를 미리 읽고 나왔을 법도 했다. 채 기자는 ‘땡깡, 그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금기어를 듣다니’란 글에서 ‘땡깡’은 간질(癎疾)을 뜻하는 전간(癲癎)의 일본어로 일제 잔재이고, ‘간질’도 2009년 ‘뇌전증’으로 순화하기로 학회에서도 결정한 낱말이라며, 일제 잔재이자 환자에 차별적인 이런 ‘낡은 용어’를 추방해야 마땅하다고 언성을 높였다.

누리꾼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한 누리꾼은 “땡강은 간질병이란 뜻의 ‘뗀깡’이라는 일본어에서 왔는데요, 일제에 따르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본어의 잔재인 것은 알았지만 이런 뜻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땡깡 부린다’는 말을 ‘생떼 부린다’ ‘억지를 쓴다’는 말로 바꾸어 사용합시다”라고 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말이란 그냥 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골라 써야 하고 그 뜻을 알고 써야 한다”고 점잖게 나무랐다. 일본식 용어의 무의식적, 무분별한 사용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일본식 용어의 무분별한 용례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 ‘애창곡’이란 뜻의 ‘18번’이란 낱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말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입에서 나왔다. 안 대표는 지난 14일 대구 동성로의 한 음식점에서 청년들을 향해 “‘이기자’는 제 18번 건배사”라며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나 ‘18번’이란 용어가 우리의 판소리에 비견할 전통 일본극 ‘가부키(歌舞伎)’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안철수 대표가, 추미애 대표도 마찬가지이지만, 왜색(倭色) 짙은 용어를 모르고 사용했다면 평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바닥 수준이란 것을 의미한다.

‘땡깡’, ‘18번’뿐만이 아니다. ‘핀잔’ ‘꾸중’을 뜻하는 ‘쿠사리’(くさり=본디 뜻은 ‘썩은 음식’)를 비롯해 무수한 일본어 잔재가 아직도 버젓이 대한민국의 정가(政街)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문제는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따끔한 ‘쿠사리’(?)라도 한 번 주어야 그때쯤 풀릴 것인지, 애가 다 탄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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