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사라진 울산 소금, 그 흔적을 찾아서
[이정호칼럼]사라진 울산 소금, 그 흔적을 찾아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1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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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모래밭은 점점이 가지런하고/ 하늘에 빗긴 달그림자 희미하게 보이네/ 바람 따라 흩어졌다 바람 따라 가버리더니/ 흔연히 찬 부엌에 들어와 일제히 깔리네.” 앞의 글은 울산 선비 이동영(1635-1667)이 남긴 <이휴정8경> 중 7경인 <염시청연(鹽市靑煙, 소금장터의 푸른 연기)>을 번역한 시이다. 이보다 앞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울산8경>의 하나로 염전에서 소금 굽는 연기를 묘사한 <염촌담연(鹽村談煙)>이 있고, 또 그 이전에는 고려 말에 울산에 온 설곡 정포가 <벽파정>이라는 시에 삼산염전 모습을 나타낸 바 있다.

울산에는 ‘염포(鹽浦)’라는 지명이 있다. 소금을 실어 나르는 포구라는 뜻일 것이다. 그 옛날의 소금은 전매품으로, 염장관이 공염분(염소, 염전)을 관장하여 조정이 공납하는 생산체계였으나 일부는 사염분에서도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고문헌의 기록에 울산에는 소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소금 거상으로 부자가 된 대표적인 사람은 구한말 김규한이다. 그는 소금으로 번 돈으로 아들인 추전 김홍조를 큰 인물로 성장하도록 길을 터 주었다. 월북 인사인 이종만은 소금으로 돈을 벌어 금광왕이 되었다.

조선 중기 독도를 지켜낸 박어둔은 마채염전에서 소금을 굽던 염간이었다. 울산 최초의 소금장수는 고려시대의 이선이다. 그는 소금으로 번 재력으로 천민 신분의 아들 이의민을 요직에 오르게 했는데, 무신정권에서 무자비한 권력자가 되었다. 울산김씨의 어느 조상이 고창 줄포로 옮겨간 것도 소금과 관련이 깊다. 고창으로 이주한 울산김씨는 하서 김인후라는 큰 인물을 배출했고, 그의 대표 후손들은 동아일보의 김성수와 삼양사의 김연수가 있다. 시대를 더 올라가면 울산 소금은 달천의 철과 함께 신라 융성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뜬금없는 소금 이야기는 한 남자를 만나면서 비롯되었다. 10년도 더 넘게 영남알프스 산자락을 돌아다니던 그를 나는 어느 가을 산길에서 만났다. 그는 그 옛날 산이 사람들 삶의 터전이었을 때 이야기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를 만난 그 이듬해던가 그는 사라져가는 산자락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샅샅이 기록하여 《영남알프스 오디세이》를 펴냈다. 그 책에는 오자마을 사람들의 삶, 5일장 오가는 이야기, 억새풀과 산나물, 숯가마와 태기꾼, 호랑이와 빨치산 등 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또 산길에서 소금장수 이야기도 설핏설핏 해댔다.

그때 그가 소금 이야기를 예사로 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는 그 무렵 소금 길은 생명의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2014년에 ‘울산학연구센터’의 지원을 받아 ‘울산 염부들의 구술사’인 《울산 소금 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은 그의 발품을 팔아서 쓴 책이다. 책을 내는 과정은 일 년이 채 못 되지만 오래 전부터 틈틈이 탐문에 나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그를 따라 산길을 걸으면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다. 또 그가 주도하는 상북면 희망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면서 이 괴짜 인물이 정말 큰일을 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어느 날 그의 세 번째 책 《소금아 길을 묻는다》 북 콘서트가 열렸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소금은 모두 바닷물을 가두고 농축시켜서 함도를 높인 후 커다란 솥에 달여서 만든 자염(煮鹽)이었음을 밝혀내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울산제일일보 논설실장과의 집중 인터뷰에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부시장이 그의 역사와 문화 콘텐츠 발굴에 기여하고 있음에 대한 고마움과 향후 소금 만들기 재현 가능성을 비쳤다는 점에서 아마도 그는 무척이나 고무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그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에 감동한다. 산길과 산자락은 이제 더 이상 생활공간이 아니다. 호랑이도, 표범도 암각화 속에만 남아 있다. 사상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간 빨치산도 먼 옛날이야기이고, 달짝지근한 울산의 전통 소금인 자염도 이제 맛볼 수가 없다. 다행히도 그가 있어서 영남알프스 오지 사람들과 산자락 사람들의 애환을 채록해 두었다. 울산 소금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의 전통소금 제염법이나 소금길에 대해 그는 한 획을 그었다. 호랑이의 흔적은 여전히 추적 중이고, 빨치산 이야기는 그가 후일의 과제로 미룬 퍼즐이다.

“울산사람들을 먹여 살린 고대 산업은 소금과 철이었습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소금과 연을 맺었던 민초들의 고단했던 삶도 짚어보아야 한다. 쇠붙이가 그러하듯 바닷물이 소금 결정체가 되기까지 엄청난 노동력이 요구된다. 소금이 산 넘고 고개 넘어 오지마을에 이르기까지 소금장수는 등골이 휘었다. 먼 옛날로부터 시작되었을 울산 소금의 족보를 밝힌 배성동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다음번 글에서는 울산 소금이 사라지기까지의 이야기며, 복잡다단한 제염법, 추풍령까지 올라간 울산 소금의 행로를 담고자 한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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