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농업인회관, 사랑방처럼 복닥거렸으면”
“울산농업인회관, 사랑방처럼 복닥거렸으면”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09.12 20: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수부 울산시농촌지도자회 회장
▲ 안수부 울산시농촌지도자회 회장.
석탑산업포장 받은 ‘안성농장’ 주인

지난 7일 이른 아침, 대절 관광버스 1대가 울산시농촌지도자회 회원 405명을 태우고 북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는 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 창립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 농촌진흥청(전주시 완산구 농생명로 300).

대절버스 속은 축하 분위기 일색이었다. 쏟아지는 덕담에 장관상 수상자 2명도 표정관리 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을 받게 된 최미영 생활개선회장과 황윤대 4-H 부회장이 바로 그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이날 최고의 주인공은 ‘석탑산업포장’을 끌어안게 된 안수부(74) 울산시농촌지도자회 회장. 그는 회장직을 2년 반 넘게 맡아오면서 울주군 언양읍 ‘안성농장’(정거고중길 27-3)에서 부인 박복자(70) 여사와 함께 소 50마리를 애지중지 키우는 중이다.

이름만 농장인 ‘안성농장’은 ‘가천 린포크’나 ‘희성식품’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전형적인 농촌 가옥 모양새다. ‘언양축산농협 육가공공장’도 바로 가까이에 있다.

“지도자회에 헌신해 지역농촌 발전과 농가소득 증대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 43년의 노력을 인정받아…” 공적조서의 일부다. 농사꾼 경력이 43년이면 30대 초반에 농사일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다.

농촌지도자 되게 만든 ‘악바리 근성’

고향에 뿌리 내리기로 결심한 계기가 최소한 두 번은 있었다. 중학생(언양중학교 10회) 때 가입한 ‘4-H’ 동아리 활동이 그 불씨였고, 기폭제 역할은 군대생활이 했다고 해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안 회장도 그 점을 시인한다. “군대에 가서 강해졌지요.”

원주 하교대(하사관교육대)에서 ‘일반하사’ 교육을 받았다.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은 ‘자갈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악바리 근성이었다. 덤으로 하나 더, 기계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솜씨가 농촌 정착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가정에 대한 꿈도 무르익어 갔다.

제대를 하고 얼마 안 있어 봉계리가 고향인 박 여사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젠 살림밑천 장만하는 일만 남았다. 손재주도 살림 겸 ‘자동탈맥기’를 구입했다. 과녁을 적중시켰다. 저잣거리 말로 ‘한참 잘 나갔다’.

“다른 농가에 세를 받고 보리타작을 해주는 겁니다. 한 1년 하고 나니 논 다섯 마지기(‘1천 평’)가 생깁디다. 몇 년 간 바짝 달라붙었지요.”

자신감이 생기고 인기도 얻었다. 탄력이 붙고 날개도 달렸다. 1979년 2월, 30대 중반 나이에 언양읍 직동리 신화마을 이장에 부임했다. “당시 일은 아직도 생생하지요.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바지저고리 입고 갓 쓰고 다니시던 때였으니 말입니다.”

이장 직을 6년간 계속 맡았다. 그만둘 때도 됐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오륙년 하고 나니 이런 충고가 생각납디다. ‘잘한다 할 때 그만두는 게 제일 좋다’고 말입니다.” 요샛말로 ‘무대에서 박수 받을 때 내려오라’는 표현하고 다를 바 없다.

채종포 운영으로 공동기금도 장만

하지만 돌아가는 지역 분위기는 또 다른 짐을 숙명처럼 지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져야지 하고 기다렸던 ‘농촌지도자의 짐’이었다. 언양읍지회장 6년(1998. 2∼)을 하고 나니 이번에는 울주군연합회 회장 6년(2004. 2∼)과 울산광역시연합회장 3년(2009. 2∼)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한 기를 조용히 거르나 싶었는데 2015년에는 또 다시 두 번째 광역시연합회장직 제의가 들어왔다. 내년 2월 임기가 끝날 때까진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참고로, ‘농촌지도자회’는 안 회장이 세 살 무렵이던 1947년 ‘우애·봉사·창조’의 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됐다. 이후 70년이 넘게 과학영농과 농촌문화 창달의 길잡이 역할을 다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맏형 격 농업인단체다. ‘영농후계자 육성, 농가소득 증대, 농업인 권익 보호와 복리 증진을 목표로 국가 발전과 선진농업·농촌 발전에 기여한다’는 소명의식은 울산지역 770 회원들의 하나같은 자긍심이기도 하다.

하고많은 일 중에도 언양읍지회장 하던 때의 일은 아직도 작지만 값진 보람으로 남아있다. 벼 채종포(採種圃) 구상을 차근차근 실천에 옮긴 일이다. 사업 시작에 앞서 지(智)·덕(德)·노(勞)·체(體)로 상징되는 ‘4-H정신’을 먼저 떠올렸다. 그 바탕에 흐르는 ‘공동체의식’을 빼고 나면 밀어붙일 힘이 미약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농기계의 작업효율을 양껏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논 50마지기(1마지기=‘200평’)부터 장만했다. 기금 확보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는 언양농협 이사직 8년의 경력도 제법 비옥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울산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은 결정판이었다. 밀양작물시험장에서 미질(米質)과 수량(收量) 면에서 뛰어난 우량종자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센터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언양농협 조합장한테서는 ‘농가소득 증대를 위한 종자 갱신’이란 명분을 내민 끝에 ‘연간 300만원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 보람이 지금까지 이어져 한 해에 200만원은 군말 없이 지원해 준다. 2002년부터 8년간이나 맡았던 언양농협 이사 직함도 한 몫을 했을 법하다.

큰 기복 없는 소농사…50마리 키워

안 회장이 쌀(米)농사에서 소(牛)농사로 방향을 튼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처음엔 소 스무 마리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쓴맛을 보았다. 시세가 폭락한 때문이었고 달리 어쩔 도리도 없었다. “쌀가마니 잡히고 논문서까지 잡힌다는 말, 그때 처음 실감이 납디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다시 일어서겠노라 이를 악물었다. 버티게 해준 것은 군대생활에서 익힌 ‘하사관 기질’이었다.

1980년대 후반은 소에다 승부를 건 시기였다. 옛날 논이던 땅에 우사(牛舍)를 지었다. 새끼를 낳게 해서 번식시키는 재미에 다시 빠져들었다. 규모를 갖춘 축사를 올렸던 시기를 19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50마리를 기르고 있지만 한때는 80마리 대가족을 거느린 적도 있었다.

“처음 실패 본 때 말고 소는 큰 기복이 없었지요.” 시세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표정이 밝아진다. ‘소값 파동’을 주기적으로 겪는다 해도 소농사는 ‘꾸준하다’는 게 큰 매력이다.

축산에 몰입하다보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 떨어지는’ 일도 생겼다. 4녀1남 중 막내인 외동아들 종덕(41)씨가 가업을 물려받기로 작심한 것. 2년 전 직장생활을 접고 영농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아오고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기계라면 종덕 씨도 아버지를 닮아 ‘한 솜씨’ 한다는 사실이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인 셈이다.

“아들이 농기계로 옥수수를 베고 밭도 갈아주고 하지요.” 옥수수라면 소 먹잇감이다. 여름철엔 옥수수, 겨울철엔 호맥(라이그라스)을 재배해 안성농장의 소들에게 먹여 살찌운다. 번식용 암소 스무 마리와 식육용 거세우(去勢牛=생식 기능을 제거한 수소) 즉 고깃소 서른 마리는 이제 안성농장의 대들보나 다름없다.

소농사를 선호하게 된 이유가 있다. 안 회장이 정곡을 찔렀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남아돌아가는 쌀은 지어봐야 매년 적잡니다. 쌀값은 20년 전보다 더 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현명한 판단이다. 안 회장뿐만 아니라 요즘 농업인들은 ‘제 발등 제가 찍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은 없다.

부인 박복자 여사 “성당 같이 다녔으면”

울산시농촌지도자회 회장직을 두 번이나 맡다보니 할 말은 할 줄 아는 용기도 제법 생겼다. 지난여름 혹심한 가뭄 때 가뭄 현장을 방문한 김기현 시장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석탑산업포장 수상 소식을 제일 먼저 전화로 알려주면서 축하해준 분도 김 시장이었다. 오는 19일 시장실에서 10개 농업인단체 관계자들과의 면담 자리도 따로 마련해 준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시장님, 만나서도 얘기하겠지만, 돋질로에 있는 4층짜리 농민회관(→울산농업인회관)에 제발 사람들 좀 북적거리게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관을 왜 텅텅 비게 놔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월평성당 가까이에 자리 잡은 ‘울산농업인회관’에는 농촌지도자회 시·구·군연합회는 물론 농업경영인회, 농촌생활개선회도 같이 입주해 있다.

안 회장이 다시 말을 잇는다. “요즘 퇴직하고 귀농·귀촌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분들이 안심하고 농촌에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 지도자들이 자문역을 맡게 해주고 농민회관이 귀농·귀촌이나 도시농업 얘기를 허물없이 주고받는 ‘농촌·농민 사랑방’이 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깁니다.”

안 회장은 아직 종교가 없다. 부인 박복자 여사만 30년째 언양성당에 나가고 있을 뿐이다. 다소곳이 남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박 여사가 인터뷰 말미에 희망사항 한 가지를 조용조용 말했다. “우리 안 회장님, 내년 초에 회장직 그만두시면 부디 성당 나오시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드릴 참입니다.”

안수부 회장은 2004년 10월 전국농촌지도자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 정동석 기자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