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지진, 그리고 ‘생존배낭’
경주지진, 그리고 ‘생존배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1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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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9월 12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이날 오후 7시44분과 8시33분 두 차례에 걸쳐 규모 5.1과 5.8의 큰 지진이 이웃 역사유적의 도시 경주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1978년 관측 이래 최대 규모였던 강진은 경주 민가의 흙 담장을 무너뜨리고 기왓장도 내려앉혔다. 언제부턴가 언론들은 이날을 ‘9·12 경주지진’으로 표현하길 즐긴다. 달리 표현해 달라는 경주시민들의 하소연은 들은 척도 안하고….

그 한 돌을 이틀 앞둔 10일, 언론들은 경주시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무너진 흙 담장’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경주 지진 1년…생존배낭 정리하는 마을 주민> (경주=뉴스1), <1년 지나도 지워지지 않은 ‘지진 트라우마’>(경주=중앙일보)도 그 중 하나다. 뉴스1 사진기자는 경주시 내남면 부지1리에 사는 최낙봉(78)씨가 이른바 ‘생존배낭’을 정리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지진 직후 롯데백화점이 마을주민들에게 지급했다는 생존배낭엔 안전모와 구급약품, 비상식량 등이 들어있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현관 신발장 안에 붉은색 배낭을 가족 수만큼 둔 채 생활하고 있다는 경주시 노동동에 사는 윤현승(44)씨 얘기를 기사로 올렸다. 배낭 안엔 생수와 전투식량, 통조림, 손전등, 헬멧, 소형라디오 등이 들어있다고 했고, 그 중에서도 ‘김병장 전투식량’(파운드케이크)이란 글귀에 특히 시선이 끌렸다.

‘재난대비 비상용 가방’인 생존배낭 얘기는 몇 해 전 TV로 보고 처음 알았다. 선정적 화젯거리를 쫓아다니던 미국 한 방송매체의 기획프로그램이었고, 그때만 해도 그들만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다. 별도로 설치한 비밀창고에 빼곡히 채워둔 통조림·병조림에 각종 응급구호장비, 심지어는 약탈에 대비한 총기류까지…. 우리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 안 가는 짓거리란 생각에 그들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딴판이다. 경주의 최씨, 윤씨 소식에서도 짐작이 가듯 ‘둠스데이’(doomsday=지구 최후의 날, 운명이 정해지는 날)에 대비한 생존배낭의 존재는 지금 우리에게도 급(急)관심의 대상으로 이미 떠올라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포털사이트엔 생존배낭의 수입·제조·판매와 유관한 업체 수가 수두룩하고, 그 수 또한 갈수록 느는 추세다. 지진대피용 가방, 재해·재난대비 응급키트(구급가방)에다 방독면, 산소공급기까지 종류는 실로 다양하다 못해 다채롭기까지 하다. 가격은 낮게는 3천960원(휴대용 응급키트), 8천800원(혁대용 응급구급낭)짜리가 있고 높게는 200만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심폐소생 자동제세동기)도 있다. 잠시 쉬어도 갈 겸 ‘트레블 기어(Travel Gear)’란 업체의 선전 문구를 한 번 들여다보자.

“지진대비 생존배낭 챙기기. 지진으로 불안함이 커지는 요즘… ‘난 내가 지킨다!’ 여행 중 재난에 대비한 생존배낭 챙기기….” 그러면서 취급상품을 차례로 소개한다. 응급 보온포, 배낭, 구급용품(약통, 벌레퇴치…), 비상식량(라면, 비빔밥…), 손전등, 호루라기, 침낭, 비상용 망치, 세면도구(샴푸, 린스, 바디워시…), 비옷, 담요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만 빼고’ 총출동이다. ‘재난대비’, ‘여행용’이란 수식어가 장삿길도 틔워주었으니, 경주시민들껜 송구스러운 얘기지만, ‘9·12 경주지진’이 이들에겐 ‘대박’이 예감되는 천지대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까마귀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 1년 전 하늘이 내려준 교훈을 잊지 말자는 얘기다. 경주시민의 불행은 울산·포항시민은 물론 온 국민의 불행일 수도 있기에 하는 소리다. 관광객 발길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경주시와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경주시민들을 먼저 생각했으면 한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9·12 지진은 경주시민들의 생활방식 자체를 바꿀 정도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지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니 관광객들도 안심하고 경주를 다시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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