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과 도산성전투
정유년과 도산성전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0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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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에서 날아든 소식에 깜짝 놀란다.

남원 향토박물관이 ‘정유재란과 남원성전투’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연다고 한다. 특별전의 부제는 ‘정유재란기 남원성 전투로 보는 호남’이라고 한다. 특별전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쓰인 천자총통, 지자총통, 난중잡록과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의 자기 등 1천여 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전주역사박물관, 계명대 동산도서관, 만인의총 등 25개 기관이 보관한 자료를 한곳에 모은 것이다.

남원성전투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1만 의사가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싸움을 말한다.

남원 사람들은 420년 전 정유(丁酉)년의 아픔을 이렇게 되새기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두 차례 있었다. 도산성(島山城)전투라고도 하고 울산성전투라고도 한다. 남원과는 반대로 지금의 학성공원에 왜군이 쌓은 성을 조선군과 명군이 공격한 전투이다. 전투 규모도 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두 차례의 도산성전투는 정유재란의 전황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왜군이 육전(陸戰)에서 가장 고전(苦戰)한 전투로 기록된다.

울산지역으로서도 두 차례의 큰 전투는 극심한 상처를 남긴 사변이었다. 울산지역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초토화됐다. 조선과 명, 일본 등 3개국 병력 6~7만이 뒤엉켜 전투를 두 차례나 치렀으니 당시의 상황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울산대 연구교수인 송수환 박사는 조선시대 울산 호적대장을 토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피폐된 울산을 복구하는데 전란유민들이 동원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송 박사는 당시 호적에 ‘소모(召募)’라고 표기된 사람은 전란 직후 울산에 설치된 소모군(召募軍)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소모군들은 전후복구의 소임을 마치고 대부분 울산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사회는 정유재란 이후에 전란 피해복구를 하며 재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산성전투의 왜군측 주인공은 단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이다. 1차 전투 당시 서생포왜성에 머물던 가토는 포위된 도산성에 잠입해 전투를 지휘했다. 평생 전쟁터를 떠돌며 크고 작은 무공을 세우며 성장한 가토의 한 평생에서도 소중한 전투였다.

전란 이후 구마모토(熊本)의 다이묘(大名)로 부임한 가토는 구마모토성을 축성했다. 이 성은 지난해 구마모토를 강타한 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돼 보수중이다. 가토는 이 성을 축성하면서 도산성에서의 고전 경험을 반영했다. 우물을 120개나 팠고 곳곳에 유실수를 심었다. 그리고 다다미는 고구마순으로 짰다. 비상시에 식량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토는 일본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역사인물이다. 일본인들의 관심도 높다. 따라서 지금은 울산왜성이라고 부르는 도산성은 일본인들에게도 흥미로운 유적이다. 지금도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을 다녀가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온 일본인 수학여행단은 경주로 가는 도중에 반드시 울산왜성을 경유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울산에서는 정유년인 올해 정유재란과 관련한 이렇다 할 이벤트가 보이지 않는다.

울산성전투를 주제로 하는 학술세미나와 특별전시회가 울산에서 한 번 열릴 법도 하다. 울산박물관이 기획하면 좋을 것이다.

나아가 울산성전투 기념관 건립 계획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시민들에게 향토사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과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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