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수(出穗)…생명 꽃이 피었습니다!
출수(出穗)…생명 꽃이 피었습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8.2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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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용 식물과 과일나무의 꽃은 화(花) 혹은 개화(開花)로 부른다. 이삭의 꽃은 수(穗) 혹은 출수(出穗)·발수(發穗)라 부른다. 정서적 관점의 꽃과 생명의 원천인 곡식은 표현부터 다르다. 곡식은 생명을 지속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보리 꽃을 맥수(麥穗)라 표현하는 이유도 그렇다.

게으른 젊은 농부가 있었다. 바쁜 농사철이지만 이불의 미련을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밖에서 이따금 ‘어∼이’, ‘휘∼이’ 하는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농부는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내 결론을 내렸다. 아직도 겨울철이라 세차게 몰아치는 찬바람에 전깃줄이 우는 소리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마린 소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고 보니 확 트인 문전옥답에서는 이미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 들렸던 ‘어∼이’, ‘휘∼이’ 소리는 못줄 넘기는 소리와 모를 심느라 굽혔던 허리를 펴며 내쉬는 숨비소리임을 알았다. ‘봄에 밭 갈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春不耕種秋後悔)’는 주자 십회(十悔) 중 하나를 어릴 적 자주 들려주신 할머니의 교훈적 이야기를 옮겨 봤다.

필자는 고향 양산에서 나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못줄을 잡은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갈치 포 조린 반찬을 곁들여 먹는 들밥은 살구씨 기름을 외면 못하는 여우같이 여덟 살배기를 유혹했다. 그러나 모내기 판에서는 나이 구분 없이 어린이도 인부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못줄 잡아라.” 누군가 어린 나에게 강요했다. 멈칫멈칫하던 나는 어느새 못줄을 잡고 있었다. 매끄럽지 못한 못줄잡기로 간격도 못 맞추고 그만 얼굴에다 못줄을 퉁기고 말았다. 놀란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평소의 인자한 모습은 간데없이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질러댔다. “오늘 모심기 다 글렀네.” 누군가가 내뱉은 소리에 “못줄도 못 잡는 등시(등신) 같은 자슥(자식)”으로 낙인찍히면서 못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못줄을 놓고 기죽어 한동안 뭘 해야 할지 망설이는 나에게 누군가 “그렇게 있지 말고 저 주전자 들고 저기 참새미 가서 물이나 떠 온나(오너라)”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57년 전 기억이 새롭다.

필자는 현재도 못줄 잘 잡았다는 농촌 출신의 여유로운 무용담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은근히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으로 못줄 넘기는 소리는 ‘어∼이’이다. 건배 구호로 활용되기도 하는 정감어린 ‘어∼이’는 지방에 따라 ‘줄∼’(거창 지역)로도 나타난다. 못줄 잡이의 구호는 짧은 소리가 특징이다. 이는 노동력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손자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잡아도 모두 ‘어∼이’로 통한다. 현대는 못줄 넘기는 소리가 ‘어∼이’도 ‘줄∼’도 아닌 이앙기 소리 ‘탈 탈 탈’로 통일됐다.

필자는 십 수 년 전부터 매년 모내기철이면 범서 입암들을 찾는다. 조류 현황 조사가 목적이지만, 이앙기 소리를 들으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어른들에게서 모내기 할 때 들은 정감어린 말투를 곰씹으며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내기철이 엊그제 같은데 입추가 지나자 입암들에는 거짓말처럼 벼이삭이 피었다. 올해 출수는 작년에 비해 더 반갑다. 극심한 가뭄을 이기고 핀 벼꽃이기 때문이다. 올해 강우량(괄호 속은 작년 강우량)은 4월 70.5(179.2)mm, 5월 26.3(86.1)mm, 6월 38.5(61.9)mm, 7월 104.6(22 6.9)mm로 나타났다. 작년 강우량과 비교하면 43.3%로 50%에도 못 미쳤던 것이다. 중국의 왕수(汪洙)가 ‘오랜 가뭄에 내리는 단비(久旱逢甘雨)’를 인생사희(人生四喜) 중 하나로 꼽을 만큼 비는 농사에서 중요하다. 특히 발수기(發穗期)는 충분한 물 공급도 절대적이다.

단종 2년(1454년 7월 18일) 기록에는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금 벼의 발수기(發穗期)를 당하여 수십 일을 비가 오지 않으니, 청컨대 도랑을 수리하고, 밭둑길을 말끔히 하며, 원옥(?獄)을 심리(審理)하고, 궁핍(窮乏)한 자를 진휼(賑恤)하며, 드러난 뼈를 덮어주고, 마른 뼈를 묻어주고, 북교(北郊)에 우사(雩祀)를 지내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했다. 발수기의 중요함을 짐작할 수 있다.

가뭄을 극복하고 핀 벼꽃을 누구는 자연의 섭리라고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혼자서 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다. 포곡 새는 초여름부터 모내기를 재촉하며 ‘포곡(布穀)∼ 포곡(布穀)∼’으로 울었다. 소쩍새는 온 밤 내내 이 산 저 산 옮겨가며 ‘솥 적다∼ 솥 적다∼’로 풍년을 기원했다. 베잠방이 걷어 올린 백로는 망시꼽배기까지 논매기 하느라고 고개 들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가하면 황작은 지난여름 논일 100일에 장승처럼 공수(拱手)하더니 요즈음은 매일 모여 농부보다 더 바쁘다. 윗배미, 아랫배미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풍·흉작을 조잘대며 간평하기에 하루해가 짧다.

불가에서 쌀은 여섯 가지 공양물 중 하나로 귀하게 여긴다. 농부가 생산한 쌀 한 톨의 무게를 천근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일미천근(一米千斤)으로 기록한다. “벼논에 김매기 하는데 한낮이 되니(鋤禾日當午)/ 땀방울이 벼 포기 아래 흙 위에 떨어진다(汗滴禾下土)/ 누가 아는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은(誰知盤中餐)/ 낟알마다 모두 괴로움인 것을(粒粒皆辛苦).” 중당(中唐) 이 신(李紳·772 ~846)의 시 '민농(憫農)'이다. 곡식이 중요한 이유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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