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목마성을 다녀와서
남목마성을 다녀와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8.1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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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자녀들을 데리고 역사의 한 장소인 남목마성(南牧馬城)을 다녀왔다. 자연과 더불어 긴 세월을 지탱해 온 남목마성. 남목에서 주전으로 가는 마성터널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잡목이 무성히 우거진 숲속 사이로 기다랗게 이어진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다름 아닌 남목마성이다.

‘남목마성’이란 그 옛날 말을 기르면서 말이 경계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쌓아 놓은 돌담장으로 마치 성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광역시 동구 동부동 산 197-1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으며, 1998년 10월 19일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남목마성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자. 조선조 초기에 펴낸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1471)의 울산군 목장 조에는 “군 동쪽 적진리에 방어진 목장이 있는데 그 둘레는 47리요, 말 360필이 방목되어 있고, 수조가 풍부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초기에 외교나 군사적으로 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처음에는 각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목장 관리를 겸임케 했다가 뒤에 가서는 전임 감목관(監牧官)을 배치하기에 이른다. 방어진 목장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전임 감목관을 두지 않고 있다가 효종 5년(1654) 이후에 배치하여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 목장이 폐지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오늘날 말은 단순히 경기용으로 이용하거나 일부 승마를 취미삼아 하는 정도이지만 과거에는 말의 역할이 현재와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오늘의 자동차산업이나 군수산업에 버금가는 중요한 국가적 기간산업이었던 것이다. 과거 군수산업이라 해야 활이나 창·칼 제조가 전부였던 시절에 말은 그 기동력을 뒷받침해 주는 필수저긴 전쟁 도구였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미사일이나 전투기, 전차에 맞먹는 역할 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세계 전쟁사에 나타난 기마군단의 역할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가장 넓은 땅을 점령한 몽골(원나라)족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 그 원동력은 날렵한 기마군단이었고, 셀주크 투르크와 인도의 무굴 제국의 광활한 영토 확장의 원동력 역시 기마군단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고구려가 만주 일대를 정복하고 군림했던 것도 용감무쌍한 기마군단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우리나라가 청나라(후금)에게 비참하게 패한 것 또한 기마군단에 의한 전술 때문이었다. 이렇듯 기마군단은 정복 역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패권의 원동력은 바뀌어져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조선·해양을 선점한 영국과 스페인에게 넘어갔다. 오늘날에는 첨단과학과 신기술로 무장한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거머쥐고 있다. 이렇듯 세계 패권의 변화를 생각해볼 때 그 초기에는 강대국을 결정짓는 힘의 원천이 기마군단이었음을 상기해 봄직하다.

오늘날 남목마성은 숲속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돌무더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과거의 동구 방어진은 산골짝 여기저기에서 말발굽 소리와 목자의 호령 소리가 쟁쟁했던 곳으로 실로 중대한 국가의 군수산업 단지였던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동구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기상과 정기의 맥이 끊이지 않고 특히 조선해양산업 분야에서 세계적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동구청에서는 ‘남목마성 복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복원한다는 것은 또 다른 관광자원으로 가치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남목마성 복원사업’을 계기로 과거 기마군단의 기상이 동구에서 다시금 부활하여 조선업 불황으로 장기간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와 산업 전반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김종철 울산 동구 교육지원과 교육이원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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