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의사를 생각하며
박상진 의사를 생각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8.13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궁화가 천지를 장식하는 8월이 되면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박상진 의사가 생각난다. 35년 전 울산을 처음 찾은 날 태화강변에 우뚝 서있던 낯선 동상을 보고 누굴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오랫동안 중구민으로 살아오면서 그 동상 주인공의 삶이 대한민국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는 진정한 애국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분이다. 북구 송정동에 생가가 복원되고, 가까운 옛 ‘송정못’은 ‘박상진호수공원’이란 이름으로 기념되고, 중구 학성공원에는 오래된 그의 추모비가 서있다.

태화강변에 서있던 박 의사의 동상은 현재 중구 동헌 옆 북정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그러나 의외로 박 의사를 잘 모르는 분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광복회가 비밀결사조직인 데다 해방 후 득세한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애써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1884년, 울산 송정리 만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난 박 의사는 당대의 석학 허 위 선생 문하에서 한학과 정치와 병학을 배웠다. 다시 양정의숙에서 경제와 법률을 공부하고 1910년에는 판사 시험에 합격한다. 그러나 조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평양지법 발령을 마다하고 중국 여행에서 신해혁명을 목격한 뒤 곧바로 독립투쟁의 길로 뛰어든다. 독립운동자금 확보, 계몽 활동, 대한광복회 조직에 나서는 등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박 의사가 활동하던 시대는 국내적으로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등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런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치욕의 일제강점기를 맞게 되고, 민족지도자들은 계몽주의 세력과 의병주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계몽주의와 의병주의 세력 은 갈등을 빚게 되고, 이 두 집단의 요구를 적절히 수용해 1915년에 발족한 것이 대한광복회였다.

광복회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징수 세금 등을 자금원으로 만주에 군사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기를 구입해 때가 되면 일본을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활약했다. 조직의 4대 강령(비밀, 폭동, 암살, 명령복종) 준수를 다짐하고 광복회에 가입한 각지의 상점을 연결고리로 의연금 모금에 나서지만 친일 부호들은 애써 이를 외면했다. 광복회는 이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고 회원들은 체포되어 형을 살거나 사형을 당했다.

박상진 의사도 1918년 초 만주로 피신하려고 안동에 사는 이동흠의 토굴에 숨어들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 땅을 밟게 되었으나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도 다 치르지 못한 채 일경의 무리에게 체포되고 만다.

박 의사는 3년의 옥중생활을 거쳐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그는 우리들에게 가슴 아픈 유시와 절명시를 남겼다. 이 두 편의 시에는 ‘남자로 태어나 다행이었지만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지도, 나라를 구하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는 남아의 슬픔’이 짙게 배어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전쟁기념관은 ‘8월의 호국인물’로 박상진 의사를 선정했다. 젊은 나이에 개인의 부귀를 탐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 지도자 박상진 의사를 이번 기회에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도 다시 한 번 느꼈으면 한다.

양구희 중구뉴스 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