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와 아픈 과거사의 반전(反轉)
군함도와 아픈 과거사의 반전(反轉)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8.0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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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제하 강제징용을 다룬 ‘군함도’ 영화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일본이 강제연행을 조직적으로 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이 기점이었다. 일본이 총동원체제를 내려 전쟁준비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등 한일 간 과거사는 반인도적 행위임에도 이를 부정해 왔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원래 이름은 ‘하시마(端島)’이지만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軍艦島)’라 불린다. 군함도는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 축구장 2개만한 크기의 인공섬으로 섬 전체가 탄광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 폐산, 군함도는 무인도가 되었다.

군함도는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당한 곳이다. 조선인들에게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 불린 군함도의 갱도는 해저 1천m를 넘고 평균 45도 이상의 고온이었으며 가스 폭발 사고에 노출되어 있었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기에 체구가 작은 어린 소년들이 강제 징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노동 환경이 열악한 해저 탄광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하루 12시간 이상 채굴 작업에 동원되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군함도에서 최대 8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중 122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무뢰배)에게 시해된 일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일본 낭인과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조선인 우범선이다. 그는 당시 별기군 대대장이었는데 황궁을 지켜야 했던 군인이 오히려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 일로 보복을 두려워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 조선인 자객에게 피살된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은 그의 아들은 고된 생활 속에서도 일본인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농림성에 취직을 한다. 그러나 창씨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반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도키이 종묘회사의 농장장으로 직장을 옮긴다. 해방 뒤 일본에서 채소나 과일의 종자를 수입했던 우리나라는 우범선의 아들이 육종학(종자개발) 전문가임을 알고 그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조국의 부름에 그는 처자식 및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귀국해 한국 농업과학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 뒤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개발해 한국 농업의 근대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다. 그러자 정부에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종자개발에만 헌신했다. 그가 다름 아닌 ‘씨 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다. 우장춘家 父子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역사적 아이러니임이 분명해 보인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다른 인생길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군함도 영화 한 편과 우장춘의 이야기는 광복 72주년을 앞두고 아픈 과거사를 되돌아보기에 충분하다. 광복절을 맞아 일제하에 탄광과 군수공장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위안부로 유린당하고, 심지어 원자폭탄 피해까지 입은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기대한다.

신영조 시사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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