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개방’ 2제
‘미완의 개방’ 2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8.06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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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기간 중 마음먹었던 두 곳을 작심하고 둘러보았다. 한 곳은 울주군의 ‘회야댐 생태습지’였고 다른 한 곳은 남구의 ‘남산 동굴피아’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두 곳은 서로 닮은 데가 있었다. 둘 다 인공(人工)이 가미됐다는 사실, 그리고 ‘미완(未完)의 개방’이란 사실이 그것이다.

‘회야댐 생태습지’는 이미 3번이나 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 중 2번은 시의원들과의 동행이었고, 그 덕분에 배까지 얻어 타고 회야댐의 비교적 은밀한(?) 구석까지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다. 네 번째 방문길이 된 7월 28일 오후. 찌는 듯이 덥기는 전날, 전전날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탐방객은 외지 손님까지 합쳐 60명도 더 넘게 모여들었다. 회야댐 관계자는 하루 100명 한도를 거뜬히 넘기게 됐다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탐방객들은 ‘울산광역시 회야정수사업소’ 이름이 새겨진 세 가지 선물을 한 아름씩 받아 쥐었다. 수묵화 대가의 작품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널따란 부채와 생태습지에서 캐내 만들었다는 ‘연근차’, 그리고 회야댐 생태습지 탐방 안내 자료였다. 하지만 공짜도 분수가 있는 법. 접이식 부채 그림의 검붉은 색상은 더위를 갑절로 느끼게 만들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다더라?

여하간 생태습지 탐방 길은 그리 순탄치도 만족스럽지도 못했다. 섭씨 33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쉬어가는 두세 곳을 제하면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허허벌판을 행렬에서 뒤처질까봐 허겁지겁 뒤쫓아 가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설치비용이 모자라서 그런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해가림(遮陽)막은 연꽃습지 샛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전주지방 연지(蓮池)만 해도 사이사이 정자 같은 곳이 몇 군데는 있었지 싶은데…. 셔터를 누르고 포즈를 취해도 스트레스는 쉬 가시지 않았다. 사전연락이 닿았던 소장의 목소리를 잠시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릴 수 있었을까?

가장 아쉬운 것은 생태습지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정원’ 곳곳을 더 이상 둘러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잘만 하면 수달이며 고라니며 ‘종(種)의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생태학습장으로, 가능하다면 좀 더 기간을 늘려 둘도 없는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을 터인데 하던 구상이 한낱 잠꼬대로 치부되는 순간만 같았다. ‘올해는 여기까지만’ 하고 맛보이기 식 흉내나 내는 생태습지 탐방은 너무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푸념도 들려왔다. “지금은 뱀이 우글거리는 철이니 뱀 조심이나 하라”는 겁주기 식 탐방을 위해 한 달이나 습지를 개방하는 것인지 회야정수사업소에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수창고로 기능했던 남산 동굴들의 변신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들은 얘기도 있었다. 울산이 국가산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산업역군들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던 시기, 남산 동굴의 용도는 ‘주막(酒幕)’이었다. 제1동굴 초입에는 그런 사연의 일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남산 동굴은…1980년대 후반 붕괴 위험 탓에 폐쇄되었지만, 1960년대부터 약 20년 동안 소주·맥주와 막걸리·파전 등을 파는 주막으로 이용되었다. 동굴 속 주막은 특히 여름에는 시원하고 한 번에 백 명 이상 이용할 수 있어 인기가 있었다. 현재 60대 이상 되는 울산 시민들은 아직도 그때의 추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술김에 생긴 러브스토리도 적잖았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스토리텔링이 무궁무진한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래서 기대가 컸다. 지난 1일과 6일, 두 차례나 둘러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실망스러웠다. 꼬리를 문 인파 탓인지 동굴 안은 시원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지나친 인위(人爲)의 흔적들도 우선적으로 풀어야할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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