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무는 가을 들녘
해 저무는 가을 들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11.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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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을 나서 출근길을 달릴 때쯤이면 해는 나의 등 뒤에 따라 온다. 회사에 도착하면 해는 어느새 나의 머리 위에 있다. 해가 떠 있는 아침의 마을은 눈이 부신다. 어제 내린 비는 가을가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고마운 단비였다. 이곳으로 회사가 옮겨온 것이 4개월 정도 지났지만 농촌의 아침은 언제나 싱그럽고 화사하다. 비가 내린 뒤의 가을하늘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사무실에서 들녘을 바라보노라면 뜨거운 여름을 보낸 가을이 황금 옷을 벗고 있다. 출렁이는 가을파도가 농부의 손길에 의해 몰려가고 있다. 빽빽이 들어서 있던 벼들이 바닥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들판은 화려했던 색깔을 뒤로하고 뿌리박힌 잔재만 남겨두고 있다. 군데군데 쌓아둔 낟가리만이 가을걷이의 흔적을 남겨 두고 있을 뿐이지만 논두렁을 태운 검은 재도 가을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가을은 풍요로운 결실을 남기고 떠났고, 들녘은 초겨울의 이슬을 맞아 갈색 옷을 만들어 입을 채비를 하고 있다. 이제 가을은 이미 내년을 기약하고 겨울에게 무대를 넘겼다.

오전에 풍성한 가을걷이를 할 부푼 마음에 노부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할아버지는 밀짚모자를 쓰고 괭이를 어깨에 멨고, 할머니는 수건으로 머리를 덮고 호미를 들었다. 그들이 가는 들판은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천천히 가는 모습이 유유자적하다. 예년과 달리 악천후로 인한 피해가 없어 보기 드문 풍년이다. 할아버지는 먼저 논 옆에 있는 자투리땅에 심어두었던 참깨 줄기를 낫으로 베어 옮기고 있다. 할머니는 즐거운 손놀림으로 참깨를 털어낸다. “부지런히 낟알들을 모아 참기름 짜서 도회지에 나가 살고 있는 아들 딸들에게 주어야지.” 할머니는 자식에게 줄 마음이 마냥 즐거우신 모양이다. 할머니는 연신 정성을 쓸어 모아 포대에 담는다.

노부부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가져온 점심을 먹을 준비를 할 즈음에 저만치서 경운기를 몰고 오던 아저씨 한 분이 들판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에게 “아재요, 점심 맛있게 드시고 일하십시오.” 정겨운 인사에 할아버지는 손을 들어 답례를 한다. 식사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가 마을 들녘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가까운 친척들이다. 노부부는 점심을 마치고 콤바인기계가 오기를 기다린다. 벼들을 베고 그 속에 집어넣어 탈곡을 하는 기계다. 기계를 거쳐 나온 알갱이들이 정미소를 거치면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는 햅쌀이 되는 것이다.

구부정한 허리를 펼 새도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멍석 위에 벼를 가득 늘어놓고 말린다. 이슬을 머금은 벼들은 햇볕을 잘 쬐어야 영글어지기 때문이다.

탈곡기를 지나온 벼 줄기들은 다시 한 묶음씩 가지런히 정리가 된다. 초가집이 많았던 시절에는 지붕을 다시 입히는 이엉재료로 쓰였지만 초가집이 거의 사라진 요즈음에는 소여물로만 쓰인다고 한다. 들녘에 띄엄띄엄 놓여 있는 가을의 다듬질이 선명하다.

들녘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한 노부부는 요즈음 매스컴에서 연일 떠들어대는 ‘쌀직불금’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며 낫, 괭이, 호미 등 연장을 챙긴다. 아침에 왔던 대로 지는 해를 따라 발길을 움직인다.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은 없이 두 노인네뿐이지만 풍성한 가을걷이만으로 그들은 부자다. 뉘엿뉘엿 서산으로 지는 해넘이를 벗 삼아 한가로이 하루를 마감한다. 노부부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가던 해가 꼬리를 감춘다. 해는 어느새 저물어 둥지를 틀었다. 내가 하루를 보내는 회사 근처의 저녁은 해를 머물게 하는 시간이다. 지금 이 마을은 해 저무는 가을 들녘이다.

김태식수필가 (주)E.P.S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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