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더위나기
옛사람들의 더위나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7.02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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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소나기가 다녀갔다. 참 오랜만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다시 무더위와의 씨름을 계속해야 한다. 강제로 떼어낼 수 없다면 데리고 사는 게 최선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조상들은 지혜로웠다. 수(手)로 치자면 수십 수 위였다.

‘조상들의 더위나기’ 주제에서 필사(筆士)들의 입길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이는 고려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다. 그의 ‘탁족부(濯足賦)’는 청주정씨 대종회가 소식지에서도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탁족(濯足)’이라면 똑같이 발을 씻는 행위인데도 종교적, 정치적 의미가 더해진 ‘세족(洗足)’과는 그 격이 사뭇 다르다. 이인로의 탁족부- 이만하면 더위도 제 발이 저려서 도망치고 말 정도의 명문장이지 싶다.

“나물 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얇은 오사모(烏沙帽)를 뒤로 재껴 쓰고, 용죽장(龍竹杖) 손에 집고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한 움큼 손으로 물을 길어 머금고 주옥(珠玉)을 뿜어내니 불같은 더위를 피할 뿐인가.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내네.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내바람 설렁설렁 여덟 자 대자리에 영목침 베고 누워 꿈속에 흰 갈매기와 희롱하니 좁쌀이야 익거나 말거나….”

이인로는 과장법으로도 호가 난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아흔아홉 발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아흔아홉 뼈마디가 시리다”고 엄살을 부렸으니 말이다. 여기서 ‘발’이란 ‘바람이 잘 통하도록 가늘게 쪼갠 대오리나 갈대 같은 것을 실 따위로 엮어서 만든 가리개’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말의 ‘염(簾)’에 해당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를 옛사람들은 ‘발을 치는 달’ 즉 ‘염월(簾月)’이라 했다.

재미난 것은 이 문재(文材)의 호들갑스런 표현이 우리네 옛 노랫가락에도 일부나마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자전거동호회 휴게실’이란 블로그에 실린 ‘복더위를 지혜롭게 보내며’란 글의 일부를 잠시 커닝해 보면, 판소리 ‘박타령’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담양 대 땀받이에 한삼모시, 고의적삼, 전주죽선은 왼손에 들려라, 굳이 죽선 부쳐 무슨 소용이냐. ‘아흔아홉 발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아흔아홉 뼈마디가 아리도록 시린데’….”

이인로가 대단한 자연피서법이라며 추천한 ‘탁족(濯足)놀이’는 궁중이나 사대부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조 순조 때의 사람 홍석모(洪錫謨, 1781~1857)가 일반서민의 풍속(風俗)을 적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월조(六月條)에 “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 씻기 놀이를 한다”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런 풀이가 가능하다.

탁족놀이 비슷한 거라면 굳이 멀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1950년대 그 이전만 해도 일반서민의 한여름 더위나기 풍속 중엔 달빛 조요하거나 어두컴컴해진 야밤에 동네 개울가로 나가서 시원스레 멱을 감는 풍속이 있었다. 다만, 불문율 같은 철칙이 있었으니 그것은 남녀(南女)가 유별(有別)하게 멱을 감는 것이었다. 이때 개울가 위쪽은 여인네, 아래쪽은 남정네들의 차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다고 예외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학령기 이전의 어린 남자아이에게만은, 엄마나 누나의 철통같은 감시(?)하에 놓인다는 조건으로, 무엄하게도 금남(禁男)의 공간을 염탐(?)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도심의 매연에 익숙해지며 자란 사람들이라면 이 무슨 바람 빠진 타이어 같은 얘기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시골의 선들바람에 웃통을 내맡기며 자란 사람들에게도 ‘제한자유의 피서공간’이었던 개울가는 마음속 액자의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개울가를 재미만점의 물놀이장과 수영장이 대신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때가 마냥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저 마음의 사치일 뿐인 것일까?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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