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와 ‘듬벙’
기우제와 ‘듬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6.2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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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무심하시지.” 체념의 끝은 하늘에 대한 원망이다. 타들어가는 농심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마음이 놓인다. 그런 억하심정들이 쌓이고 쌓여 생겨난 것이 기우제(祈雨祭)란 녀석이다. 기우제는 ‘가뭄이 심할 때 나라와 민간에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던 제사’였다.

“하늘이시여, 비를 내려주소서!” ‘미신(迷信)’으로 몰려 퇴짜 맞은 줄 알았던 기우제가 산불 뒤끝의 잔불처럼 슬그머니 되살아나고 있다. 1년 농사를 하늘에 맡기고 있는 농민들로선 마지막 희망의 불씨라도 살리겠다고 간절히 빌고 싶은 심정 아니겠는가. 21일에는 충남 서천군과 아산시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충남 홍성군에선 2일에 이어 16일에도 기우제를 지냈다.

22일엔 보령댐이 생명줄인 충남 예산군민들이 무릎을 꿇었다. 2년 전 기우제를 올린 지 사흘 만에 많은 비를 만났던 기분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기만을 두 손 모아 빌었다. “흐뭇하게 단비를 주심으로써 가물었던 모든 땅을 소생시켜 내년 농사까지 잘 되게 하여 주시옵고…” 박성묵 예산역사연구소장이 까맣게 타들어간 농심을 대변해 읍소하듯 기도를 드렸다.

비에 대한 관심을 먼 옛날의 단군신화에서 찾는 이가 있다.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여하간 가뭄이든 홍수든 천재지변이 왕조시대엔 가장 큰 국가적 대사의 하나였다. 국왕이나 조정의 대신들은 덕(德)이 없어 정치를 잘못한 때문이라고 믿었다. 국왕은 정전 밖에서 정무를 보았고, 반찬의 가짓수까지 줄여가며 근신(謹愼)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려고 애썼다.

기우제는 조정의 연례행사였다. 조정뿐만 아니라 민간이나 지방관청에서도 지냈고, 방법은 참으로 다양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의 기록을 보면 ‘산상분화(山上焚火)’가 대표적이었다. 제관이나 마을사람들이 불쏘시개(장작·솔가지·풀 따위)를 산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중에 불을 지르는 방식이었다. 이밖에도 △물병을 거꾸로 해서 매달거나 물을 길어 올리기 △장터 옮기기 △용제(龍祭=용을 그려 붙이거나 만들어 비는 제의) △줄다리기 △부정화(不淨化=신성성을 더럽히기 위해 개를 잡아 용소龍沼·용연龍淵에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는 제의) △묘(墓) 파기가 있었다. 요즘도 볼 수 있는 경남 합천군 대병면 창리 마을의 기우제는 부녀자들의 몫이다. 밤에 디딜방아를 몰래 훔쳐와 강바닥에 세워놓고 바가지로 물을 퍼부으면서 비가 내리기를 빈다는 것이다.

전국 곳곳의 기우제에도 한이 안 찬 듯 하늘이 내린 비는 25일에도 살짝 간만 보이다가 말았다. 그러나 경남 창녕군이나 고성군에선 그런 걱정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원시적 물 저장시설’ 혹은 ‘빗물을 담는 생태연못’이라는 듬벙 덕분이다. ‘듬벙’(또는 ‘둠벙’)이란 무논 언저리에 파놓은 물웅덩이다.

KBS는 가뭄이 닥칠 때마다 곶감 빼먹듯 ‘듬벙’ 얘기를 기사로 올린다. 수삼 년 전부터 다. 2011년 10월 7일의 창녕군 뉴스에 이어 지난 6월 21일자 고성군 뉴스에서도 ‘듬벙’ 얘기가 단골로 등장했다. “<앵커 멘트>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한 웅덩이를 ‘둠벙’이나 ‘듬벙’이라고 하는데요. 조상들의 지혜로 만든 이 물웅덩이가 가뭄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습니다. <리포트> 남해안 바닷가 마을, 논 가장자리에 물웅덩이 여러 개가 줄지어 있습니다. 심한 가뭄에도 이 마을은 웅덩이 덕분에 모내기를 마쳤습니다.…이 웅덩이는 조선시대부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지표수가 모이는 곳에 만들기 때문에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가뭄도 극복할 수 있도록 22조 원이나 들여 벌였다는 ‘4대강 사업’이 쪽도 못 쓰는 지금, 기우제보다 조상들의 지혜가 가득 담긴 ‘듬벙’에서 해법을 찾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하 답답해서 한 번 해 보는 소리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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