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과 인권 사이
교권과 인권 사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6.14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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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지역 한 중학교를 찾아 직업 소개 강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30명도 채 안 되는 반이었지만 교단에 섰더니 만감이 교차하더라.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도 그랬지만 그 때와는 달리 가르침을 주는 포지션에 섰더니 아이들이 뭘 하는지 훤히 다 보이더라는 것. 그런데 아이들의 수업태도는 나를 몹시도 당황케 했다.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절반 가까이 됐던 것 같았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몰래 화장하는 아이까지 있었다는 것. 아무리 강의가 재미없어도 그렇지. 결국 수업을 마친 뒤 교장선생님에게 아이들의 수업태도를 추궁했고, 그러자 “요즘은 선생님이 학생들을 못 이겨요.”라는 한 숨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과거 당연시됐던 교사의 체벌행위가 요즘은 휴대폰이나 인터넷, SNS 등의 발달로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겪은 아이들의 수업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학교를 빠져나오면서 내 중·고등학교 시절 무서웠던 선생님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에는 <이상한 나라의 폴>의 ‘대마왕’도 있었고, <전설의 고향>의 ‘불여우’도 살고 있었다. ‘따까리’나 ‘개패’, ‘작두’, ‘해골’, ‘빼빼로’, ‘개구리’ 등도 계셨다. 모두 선생님들을 향해 학생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하지만 압권은 단연 ‘킬라’였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당시 킬라 선생님이 운동장을 지나갈 때면 몇 개의 팀들이 정신없이 공을 차다가도 모두 멈춰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그의 길을 터줄 정도였다.

중3 시절 우리 학교에는 주먹 좀 쓰는 아이들끼리 조직을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마구 조성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알게 된 킬라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킬라는 조직원들을 모두 불러 조직을 초토화시켜 버렸는데, 당시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이실직고를 하지 않으면 매질을 하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찌됐든 그 후 학내 공포분위기는 사라졌고, 킬라에겐 ‘핵폭탄’이라는 별명이 추가됐다. 킬라로 인한 공포분위기?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생님이 수업은 또 재밌게 했었다.

최근 우신고에서 일어났던 교사 가혹행위 논란을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학생들의 인권과 함께 교사들의 교권도 함께 생각해보게 됐던 건 아마도 몇 해 전 그 직업소개 수업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SNS 등을 통해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을까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교권에 대한 걱정도 함께 했다. 우신고의 사정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날 그 직업소개 수업에서 만큼은 사실 나도 반 전체에 단체기합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 안 하는 게 더 나쁘지 않나.

중1 때 담임선생님이 ‘불여우’였다. 입학하자마자 아이들을 휘어잡기 위해 선생님은 호시탐탐 건수를 찾고 있었고, 운 나쁘게도 내가 시범케이스로 걸렸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10대 넘게 맞았고, 내심 그게 미안했던 선생님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말씀하셨다. 엄마의 답변이 의외였다. “잘못했으면 맞아야죠.” 순간 속으로 ‘우리 엄마 맞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좀 멋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 후로 선생님은 나를 더욱 챙기셨다.

교권과 인권 사이에는 ‘사랑의 매’가 있다. 체벌이나 기합을 받아보면 아이들도 대번에 안다. 진심인지, 감정인지. 때문에 사랑의 매가 자리하려면 학부모의 지지가 필요하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단다.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사랑의 매는 꼭 필요하지 않겠나. 교단 높이만큼이라도 학생들보다는 교사가 좀 더 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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