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이정호칼럼]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6.1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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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길을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강물 같아야 합니다. 필생의 여정이라면 더구나 강물처럼 흘러가야 합니다. 강물에서 배우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앞서려고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시내가 강을 만나면 강물이 됩니다.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이제 스스로 바다가 됩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기어코 바다를 만들어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우리 시대에 큰 울림을 주었던 신영복 님의 <강물처럼> 전문이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바다로 흘러가는 경로를 ‘강’이라고 하는데, 우리 고유어로는 ‘가람’이라고 한다. 이처럼 강은 물이 흐르는 길이고, 그 물길에 담겨있는 것이 ‘강물’이다. 강물은 물길 따라 흐르면서 생명체에 필요한 수분을 공급하는가 하면, 모래나 자갈을 이동시키면서 너른 평야를 만들기도 한다. 또 수생식물이나 민물고기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때로 범람하여 홍수가 나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강가에 터전을 마련하고 풍요를 꿈꾸며 대를 이어 살아왔다.

냇물이 하나 둘 모여서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은 오로지 바다로만 향한다. 이렇듯 흐르는 강물은 낮은 곳을 향하여 가다가 기어이 바다에 이르게 된다. 예부터 강물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들은 많다. “강물은 묵묵히 낮은 곳으로 흐른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강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니 겸손의 모습을 보여준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고 하니 목표가 분명하다. 갖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마침내 바다에 이르게 되면 세상의 모든 물과 섞이기에 통합과 화합의 의미도 지닌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글귀가 주위를 환기시키는 데 인용되곤 한다. 지난 해 탄핵정국 초기 무렵에 대통령이 종교계 대표들에게 자문을 받은 바 있었다. 불교계에서는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이 대통령에게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는 말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리를 내려놓아야 시국이 풀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화엄경에 나오는 이 표현의 의미를 새겨들었으면 시국수습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고초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 겪지 싶다.

이런 강물이 지금은 예전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4대강에 최악의 토목사업을 벌여서 유장하게 흘러오던 강이 수난을 당한 것이다. 보(洑)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천문학적 돈을 투입하여 16개의 댐을 동시에 만들어 흐르던 강물을 거대한 저수지에 가둬버린 것이다. 강바닥은 침전물인 오니가 쌓이면서 개흙(뻘) 층이 점점 두꺼워지면서 썩어가고 있고, 강물에는 녹조가 창궐하고 있다. 뿐더러 강변의 습지를 없애거나 수천만 평의 농지를 황무지로 전락시킨 죄악도 저질렀다. 진행과정조차 불투명한 이 사업은 처음부터 큰 재앙을 예견하더니 지금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서 여간 문제가 아니다.

2017년 가을에 준공한 영주댐도 4대강 사업이 낳은 사생아다. 낙동강 유지수 확보를 위한다거나 인근 상주지역에 물을 보내기 위해 이 댐을 만들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내성천의 모래톱은 오랜 세월 동안 무섬마을과 회룡포에 천혜의 아름다움을 빚어내어 왔다. 그런데 영주댐은 모래의 이동을 막았고, 때로 방류하면 모래톱을 사라지게 할 것이 확실하다. 이미 내성천 곳곳에 흙이나 잡석이 쌓이면서 모래톱의 원형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결국 영주댐은 1조 원이 넘는 돈을 투입하여 강물과 모래톱을 울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울게 만든 괴물인 것이다.

강물이 이렇게 수난을 겪어서인지 사람들의 삶도 예전 같지가 않다. 버리지 못하고 채우기에 몰두하여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그러하고, 권력이 그러하고, 정치도 그러하다. 많이 가지고 더 배운 자들이 버리기보다는 앞장서서 탐욕에 몰두하고, 조급하여 만족 지연의 참뜻을 모르고 살아간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을 가진 ‘상선약수(上善若水)’도 자주 인용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만 비로소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만 비로소 바다에 이른다”는 말의 의미를 거듭 새길 일이다.

한 무리의 인간 군상들을 보라. 갖은 영화를 다 누리다가 영어의 몸이 된 노인도, 그게 마치 출세의 전형인양 뒤를 따르던 사내도, 탐욕의 끝판왕인 그녀도 흐르지 못하여 썩어버린 물이나 진배없다. 태극기만 흔들어대는 자들이나 자신이 싸움천재라면서 여차하면 한판 뜨자고 벼르는 자, 또 그와 비슷한 아류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촛불로 대변되는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은 역사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다. 강물이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대한민국의 꿈도 그러할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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