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놈
사랑, 그놈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7.05.25 21: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한 장면.
홍상수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이다. 여태껏 홍 감독은 한 번도 일상에서 벗어난 작품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에게서 SF나 액션영화에서 볼 수 있는 스펙터클한 장면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그 흔해빠진 살인마도 그의 작품 속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일상은 진실과 가깝다. 그렇지 않나.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나 ‘스티븐 스필버그’ 의 <E.T>보다는 여태껏 제작된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이 진실에 더 가깝다. 까놓고 말해 홍 감독의 작품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장면들이 전부다. 문제는 그 일상이 남자들이라면 보통은 숨기고 싶어 하는 그들만의 치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데서 홍 감독의 작품은 언제나 뜨겁다. 아니, 낯 뜨겁다.

대체로 그의 작품에서는 지식인이랍시고 남자 영화감독이 최소 한 명 정도는 꼭 등장하는 편이고, 비슷한 부류의 지식인들과 술자리 등에서 나름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다 가끔 발끈해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랬거나 말거나 결론은 언제나 ‘여자’다. 거룩한 지식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발정 난 수컷으로 돌변하는 데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는다.

그 변화를 보는 순간, 남자들은 마치 해머로 머리를 한 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남자들에게는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섭다. 감춰야 할 치부가 드러나니까. 어쨌거나 그동안의 그의 작품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건 꼭 등장하는 영화감독. 그렇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은 일기장 대신 필름에 일기를 쓰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 아직도 논란의 중심에 선 이번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조금 달랐다. 감독 자신의 실제 연인인 ‘김민희’라는 배우가 등장하기 때문이 크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 속에서 늘 등장했던 찌질한 지식인들을 이번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스토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유부남 감독과의 불륜으로 지탄을 받았던 여배우 영희(김민희)가 세간의 시선을 피해 평소 친한 사람들과 만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이 전부였던 것. 그랬다. 이번에도 그는 일기를 썼지만 그건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배우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사랑으로 상처를 받게 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뻔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동안-같은 남자 입장에서-그 따위 영화를 만들어온 홍 감독이 아주 착실하고 가정적인 삶을 산다는 것도 사실 위선적이긴 하다. 솔직함으로 모든 잘못을 덮을 수는 없겠지만 ‘예술’과 ‘도덕’은 그리 친하지 않다.

예술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 열정에서 예술은 또 사랑과 많이 닮았다. 때문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명수(정재영). 이미 익숙해져 여자친구 도희(박예주)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명수는 오랜만에 만난 영희에게 도희를 “그냥 친구”라고 소개한다. 그 말에 발끈한 도희는 명수에게 “콩이나 고르라”며 화를 낸다. 결국 명수는 시키는 대로 콩을 고른다. 사랑은 일상이 되면 드러누워 버린다. 홍상수나 김민희나 이 영화를 통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바로 자신들은 “그렇게 살기 싫다”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욕망은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때문에 일기 쓰듯 이번에도 분명 자신의 이야기로 보이는데도 홍 감독은 계속 “아니다”고 했던 건 또 아닐까.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기 때문. 사랑, 참 그놈이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사랑, 그놈 때문에 그 철없어 보이던 김민희가 이 영화에서는 많이 성숙해 보이더라는 것. 2017년 3월 23일 개봉. 러닝타임 101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