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선물
뜻밖의 선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5.2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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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면서 그저 넘실대는 파도를 보거나 먼 수평선의 그 너머를 생각해 본 적은 많았지만 아직 한 번도 바닷속을 들여다보리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책이나 TV로 봤던 신비로운 바닷속을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만 굳이 바닷속을 보지 않아도 늘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아름답기만 하다.

눈을 뜨면서 보게 되는 바다는 거의 평온한 날보다 파도치며 요동하는 날이 훨씬 많음을 알았다. 오히려 고요한 바다는 소금기가 빠진 것처럼 무료하게 느껴진다. 해변을 기어오르며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보는 날은 덩달아 기운이 솟는 듯하다. 지난달 말쯤부터 조금씩 파고가 높아지면서 파도가 이는 날이 많았다. 밤새 누가 모래며 몽돌을 옮겨놓은 것처럼 자고나면 달라져 있는 해변의 모습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몇 주 전 아침 해안 산책길에 나섰다가 진풍경을 만났다. 밤새 파도에 떠밀려 나온 자연산 미역이 펄떡이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잎을 세우고 해변에 덮여 있었다. 미역뿐이 아니었다. 주민들이 종자를 뿌리지 않은 다시마, 곤피 등 자연산 식용 해조류가 바다 깊은 곳에서 센 파도에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주변 분들이 귀띔을 해 주었다. 마을에서도 때맞춰 잠수로 자연산 미역을 직접 채취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삼월 초부터 시작된 어촌마을사람들의 주 수입인 양식미역 수확은 끝마친 지 한참이나 되었다.

새벽 산책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 둘 싱싱한 해변의 자연산 미역을 줍기 시작했고 얼마지 않아 그들의 손에 든 봉지 속에는 미역이 그득했다. 파도에 줄기째 뽑혀 나온 미역은 힘 좋은 장정의 팔뚝처럼 빳빳하여 비닐봉지 속에서 삐죽이 솟아나온 채 깊은 바다향을 뿜고 있었다. 보지도 못한 신비하고도 깊은 바닷속에서 올라온 녀석들을 덩달아 한 봉지 주워 들고 해변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왠지 이상한 기분은 또 뭐였을까. 마치 길에서 주운 지폐 한 장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집어넣은 어린아이 마음 같은…. 한 톨 씨앗도 뿌린 적 없는 터에서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고 가져가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에 자꾸 누가 불러 세우는 것처럼 오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찢은 황태와 들깨가루를 넣고 끓인 살아있는 진국의 맛. 활어회도 먹어 보지만 금방 건져 올린 해초로 만든 음식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깊고도 진한 국물 맛에 알 수 없는 바다의 오묘한 향이 입안에 느껴졌다. 온갖 바다생물이 함께 살며 이루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마저 드는 저녁 만찬 시간이었다. 무한으로 넓지만 한 터의 내 것도 없는 곳인데 그 곳에서 자란 자연물을 먹게 되는 행운을 바닷가 마을로 오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오월이 들어서까지도 자주 새벽 산책길에서 얻게 되는 자연의 선물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누었으면 좋으련만.

이제 일 년 남짓한 바닷가 마을에서의 생활이지만 지금껏 살던 곳과는 조금 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을 뒷산 밑자락에 작은 텃밭도 일구고 저녁 산책길에 들른 식당에서 만난 동갑 주인과 친구도 됐다. 그리고 바닷가 찻집 아가씨와는 볼 때마다 눈인사를 주고받고 바닷가 노부부와 그 집 까만 강아지와도 이웃이 됐다.

이기적이었던 생각과 일상들에 자연의 순한 냄새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좁은 품이나마 내어주는 너그러움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이제 곧 여름, 바다는 또 사람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조건 없이 나누어주고 품어주는 것이 꼭 우리네 부모를 닮았다.

지금 오월바다가 참 사랑스럽다.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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