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 봉사,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단어
[돌담길] 봉사,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단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4.26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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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딘가 낯익은 얼굴들이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나를 부르는 이름이 서너 개는 되지 싶다. “아저씨”, “회장 아저씨”, “오빠”, “오빠는 무슨, 할배구만” 한명씩 손잡고 이름을 물어본다. 이십여 년 만에 보는 얼굴에 옛날 모습이 다들 남아있는 게 아닌가. 아직 장가 못 간 남학생도 있고, 애기를 둘이나 안고 업고 온 여학생도 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중에 오래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인생의 찬란한 전성기 20대 중반. 사무실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괜찮은 모임이 있는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가입한 모임이 바로 신우회(信友會)라는 봉사동아리다. 특별히 학연, 지연 구분 없이 각자 주변의 지인들을 초대해서 십여 명의 회원들이 각출한 월회비와 수익사업을 통한 수익금으로 주변지역의 이웃들에게 봉사하고 회원 친목을 도모하는 평범한 모임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예산으로도 나름 많은 활동을 했다. 자매결연 중인 고아원생들에게 특식 만들어 먹이기, 벽에 페인트 칠해주기, 양로원 어르신께 편지 선물하기, 연탄봉사, 한여름 뙤약볕 아래 해수욕장에서 미아 예방을 위한 이름표 달아주기 등의 활동이 기억난다. 그 중에 낙도분교생 자매결연을 통해 만났던 꼬맹이들을 20년이 훌쩍 지나서 만난 것이다.

경남 통영에 ‘수도(水島)’라는 작은 섬이 있다. 통영 선착장에서 배 타고 약 1시간 정도 가면, 당시 전체 가구수가 10가구이고 지도초등학교 수도분교가 산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섬이다. 산 정상에는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아무리 큰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물이 풍족한 섬이라서 수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당시 수도분교 전체 학생이 11명이었다. 평상시에는 아이들 학용품을 우편으로 보내는 한편, 1년에 두 번은 정기적으로 만났다. 겨울방학에는 수도의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부산으로 초청하여 관광도 하고 지하철도 타보고 회원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면서 오랜 기간 동안 인연을 유지했다.

여름에 우리 회원들이 수도를 방문하게 되면 섬 어르신들은 마을잔치를 준비한다. 미리 바다에 나가 직접 잡은 해산물 중에 일부를 바닷가나 선창에 준비해두고 통영까지 어선을 가지고 마중을 나온다. 우리는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 꾸러미를 양손 가득 들고 선착장에 내려 아이들과 찐한 포옹을 한다. 자그마한 방파제 끄트머리에 있는 우물에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짝이 된 아이들과 함께 삼삼오오 학교로 올라간다. 아이들 교실에서 선물 주고 함께 노래하고 장기자랑도 하고, 운동장에서 축구도 한 게임 한다.

오후에는 마을에서 제일 큰 집에 모여 해산물 파티를 벌인다. 우선 마을에서 어선 두 척을 내어 커다란 뗏목을 양쪽에서 달아 메고 섬 앞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 닻을 내린다. 선창에서 자연산 활어를 꺼내서 즉석에서 회를 준비해 주는데 맑은 공기 덕분인지 도무지 술이 안 취했던 기억이 새롭다. 선상 파티가 끝나면 맑은 조가비 탕으로 해장한 후, 어둑어둑해진 산길을 따라 학교로 올라가 아이들과 함께 실컷 떠들고 놀며 선생님 방에서 별을 헤다가 슬며시 잠이 든다.

이튿날 마을에서 일손이 모자라 미처 하지 못한 샛길 정비나 간단한 시설 보수, 바닷가 쓰레기 줍기, 풀베기를 마치고 바닷가에서 함께 멱을 감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나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 우리가 탄 정기선이 섬 끄트머리를 돌아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잘 가라” 환송을 해준다. 이 모습은 아직도 내 가슴속 깊이 한곳에 자리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수록 받는 이가 느끼는 감사함보다 더 크게 내 가슴팍이 따뜻해지는 것이 봉사다. 봉사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단어다. 앞으로도 외로운 내 작은 가슴 한 켠에 따뜻한 사랑을 한 줌씩 차곡차곡 채워나갈 것이다. 좋은 이들과 함께, 변함없이 오랫동안.

<설문철 진석케미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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