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분노, 그리고 인간
의심과 분노, 그리고 인간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7.04.2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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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
▲ 영화 '분노' 한 장면.

<분노>에서 오키나와에 사는 고등학생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는 새로 이사 온 이즈미(히로세 스즈)를 몰래 짝사랑하다 처음으로 데이트를 신청, 시내로 같이 영화를 보러 간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 타츠야를 잃어버린 이즈미는 그를 찾다 그만 미군부대 병사들로 가득한 술집골목으로 접어들고, 그곳에서 미군들에게 납치돼 강간을 당한다. 때마침 타츠야도 이즈미를 찾았지만 거구의 미군 병사 두 명이 두려워 울부짖는 이즈미를 뒤로 한 채 그냥 숨어서 같이 울부짖는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타츠야는 며칠 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인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호소하며 이런 말을 한다. “죽을 만큼 싫은 기분이나 슬픔, 그런 거 말고 진심으로 화가 난다는 걸 전할 수는 없겠죠. 진심을 전하는 게 가장 어렵잖아요. 진심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다. 진심이란 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심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그것은 겹겹이 쌓인 장벽들로 인해 상대방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진심을 꺼내들게 만드는 게 거의 의심이라는 점에서 진심이 전달되기는 더욱 어렵다. 설령 심장 깊숙한 곳의 진심이 뼈와 살을 뚫고 밖으로 튀어 나와도 이미 의심이라는 색안경을 낀 상대방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 한다. 진심과 의심이 뒤섞인 불통의 현장에서는 가끔 분노가 괴물처럼 날뛰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는 이미 시작됐다. 분노는 의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는 순간 괴물은 새끼를 잉태하고, 점점 자라 덩치가 커져 마침내 분노를 토해낸다.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분노는 잘못 사용되면 모든 것을 망치고 만다. 범죄와 같은 잔혹한 인간의 행위 대부분이 분노를 머금은 채 이뤄지고, 사람과 사람 간의 아름다운 관계도 결국 분노로 인해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노>에서 분노는 결과일 뿐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분노 이전의 ‘의심’이다.

일본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1년 후 치바와 도쿄, 오키나와에 연고를 알 수 없는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난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데 혈안이 된 치안당국은 연일 언론을 통해 용의자의 얼굴을 내보내는데 공교롭게도 세 명의 남자는 용의자와 몹시 닮았다.

그랬거나 말거나 그들은 새로 정착한 곳의 사람들과 조금씩 관계를 맺어가고 점점 그곳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간다. 일원이 되어간다는 건, 바로 소중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 하지만 소중한 존재이기에 연고를 알 수 없는 그들을 향해 사람들은 점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의심은 이내 분노로 이어지고 괴물이 날뛰자 지옥의 문도 함께 열린다.

그래도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범인.때문에 <분노>는 진심과 의심 사이에서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의심’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어둡고 탁하지만 진실을 찾는 시작도 의심이다. 의심하지 않으면 진실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양면성은 분노의 양면성으로도 이어지는데 분노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범인은 결국 분노에 의해 잡힌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강렬해 살인을 저지른다. <분노>에서의 살인마도 그와 비슷한 이유였다. 둘 다 어의없는 일이지만 인간이란 단 1분 동안 만에도 몇 번이나 감정이 뒤바뀌는 복잡다단한 존재라는 점에서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햄버거가 미치도록 당겨 먹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라면이나 감자탕이 먹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인간은 답이 없다.

2017년 3월 30일 개봉. 러닝타임 142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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