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에 ‘퀘렌시아’(Querenci
a)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원래 사람이나 동물의 귀소 본능의 장소라고. 좀 비약해서 말하면 투우장의 소만이 아는 그 장소를 말한다.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다시 얻어내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투우(鬪牛)는 퀘렌시아에 있을 때는 투우사가 이 소를 쓰러트릴 수 없을 정도로 말할 수 없이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 중 투우사는 소가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야비한 수법까지 생각해낸다. 무쇠 같은 소의 힘을 죄다 빼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매미는 한겨울 땅속에서 내내 잠을 잔다. 인간이 느끼는 추위와 아랑곳없이 제법 만족을 하는 듯 땅속 퀘렌시아에서 휴식을 듬뿍 취하면서 보내는 것이다. 여름이 다가오면 자기의 몸에 지열을 느끼는지 땅을 헤집고 세상에 등장한다. 그것도 스스로 허물을 벗으면서 신비롭게 태어난다. 한여름 한 달의 짧은 기간 ‘이 생명 다하도록’ 왱왱 소리 내어 울부짖고 또 울부짖는다. 그런 후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우리의 찜질문화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찜질방이라곤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기껏 사우나나 노천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어딜 가나 깨끗하기 그지없고 하이쿠시를 읊으면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바깥 경치를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에 비해 우리는 63도의 소금가마, 70도의 소나무가마, 71도의 불한증막에서 땀을 빼고는, 빙하시대라는 아이스 방에서 청량감을 진탕 맛본다. 이런 퀘렌시아에서 몇 시간 뒹굴어보면 한국인의 저력을 그지없이 맛보게 된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그동안 괄목할만한 경제발전의 원천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반문하게 된다.
퀘렌시아를 우리는 이럴 때 찾지 않나 생각한다. 스포츠선수가 봄 시즌을 앞두고 한겨울 따뜻한 곳으로 전지훈련을 갈 때, 중병으로 큰 수술을 끝내고 제2의 삶을 시작하기 위하여 회복을 보듬을 때, 지친 삶으로 신성한 곳에서 일념으로 기원하려 할 때,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단조로워 만물의 모습이 무채색으로 보일 때가 아니겠나. 물론 사람마다 퀘렌시아의 시기는 다를 것이다. 어떤 경우는 외면의 장소보다 내면의 세계를 차분히 구하려할 때도 나타난다. 종교인처럼 마음치유나 명상을 수행하는 정적인 일에서다.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은 필요할 때마다 쉼표를 매겨가며 연주해야 아름다운 음악이 생생히 살아나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위협적이고 도전적인 일이 많다. 그럴수록 숨 고르면서 사는 일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자기만의 퀘렌시아를 만들어 잠시 쉬었다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지름길이 아니겠나.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