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편지] 오래된 정원
[길 위의 편지] 오래된 정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4.0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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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맛자락 젖혀 버선코 잎 내보이며 애를 태우는 봄꽃들이 수줍게 혹은 도도하게 사람들을 유혹한다. 매년 피는 꽃이건만 태어나 마치 처음 본양 연신 카톡으로 배달되는 봄꽃 사진들.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 봄바람, 봄빛, 봄 향기, 닫힌 마음 빗장마저 살포시 열고 오가니 겨울 다음으로 봄은 또 얼마나 더없이 온당한가.

긴 팔 나부대며 멋스런 춤을 추는 종려나무, 수선화 수만 송이, 바다 위 덩그러니 놓인 섬을 품고 일렬로 피어있는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가만히 들여다보자니 세상에 있을까 싶은 동화 속 풍경이 매혹이다.

이런 농원을 가꾸고 사는 이들은 누굴까, 어떤 서사를 품고 피어난 꽃들일까. 낯선 곳의 풍광을 떠올릴 때 그 풍경 속에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마다 상상의 그림 속에 사람들은 내게 늘 설렘이다.

“경치도 아름답지만 그 곳 어르신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봄빛 노란 수선화 나라, 그 사진은 거제의 공곶이였다. 거제 8경 중 하나인 와현 예구마을 ‘공곶이’는 해안을 따라 앉은 모양이 궁둥이 같아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마침 그 공곶이 주인의 아드님이 지인과 막역한 사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례한 부탁을 드렸다. 방문을 허락한다는 답신을 받고 좋아하실만한 호두과자를 한 박스 사서 거가대교의 환한 해저터널 속으로 네 바퀴에 몸을 싣는다.

진주에 태어나 자라고 월남전을 다녀온 뒤 장가를 가라며 보내진 거제도에서 처음 만난 아내, 그 아내의 집 뒷산을 산책하다 그 풍광에 반해 69년부터 맨손으로 산을 정원으로 가꾸신 공곶이의 주인은 87세 할아버지와 83세의 할머니. 오십 년 한 땀씩 늘여 나간 땅이 지금 무려 4만평 정원이다.

나지막한 언덕을 한 고비 돌아 넘으면 바다가 보이고 다시 해안 쪽으로 내려가게 되는 다랭이식 농원이다. 수십 년의 동백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고 내닫는 걸음걸음 펼쳐지는 핏빛 주단이 펼쳐진다. 긴 동백터널 저 끝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한 조각, 그 빛 따라 하나하나 켜켜이 쌓여 세월에 다져진 돌계단이 정갈하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많다. 수선화와 직접 가꾸신 각종 꽃나무들, 몇 천원에 봄 향기를 사는 사람들로 무인 판매대가 북적거린다. 작은 마을이지만 천주교 공소가 있는 예구마을, 무료로 주변 성당과 시설에 꽃을 나눠 드리기도 하고 판매도 하신다. 연두색 점퍼를 입으신 은발의 할아버지, 누가 소개해 주지 않아도 90도로 굽으신 등이 이 화원의 주인인지 금방 알아챘다. 힘들여 가꾸신 좋은 곳을 무료로 개방해 주어 고맙다고 관광객들마다 인사를 하며 지나친다. 1천 원에 파는 수선화 한 송이, 판매대에 꽃이 떨어지자 잰걸음으로 밭쪽으로 가셔서 엎드려 호미질을 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꽃모종 틈에 나무 한 그루, 조그마한 거인 나무다.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한 무리 관광객들이 돌아간 뒤, 차 한 잔 하자시며 집 안으로 이끄신다. 점심시간을 훌쩍 지난 시간, 할머니께서 한참 전에 상을 봐 놓으신 식탁에 차려진 밥이 식어 김이 오르지 않는다.

“그 시절에 사람들이 동백나무를 참 좋아했어. 종려나무랑 함께 심어 부산에 내다팔았지. 태풍이 와서 싹 다 쓸어간 적도 있어. 그래도 태풍이 불면 다음해는 풍년이 들어. 바다가 뒤집혀서 해초도 물고기도 살지, 나만 혼자 살 수는 없잖아. 함께 살아야지.”

미소가 고우신 할머니는 한 생을 회상하며 지나온 길을 나지막하게 읊조리셨고,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덧붙이셨다. 짠 소금기 갑옷으로 둘러 세상과 맞서, 눈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눕기 전까지 두 손 아니 네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고 흙을 고른 오십 년의 정원 역사, 수선화를 사랑해 꽃을 읊었던 추사 김정희의 한시, 그대로 두 분의 모습과 꼭 닮았다.

한 점의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 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

휘어진 손가락을 펴 보이시며 “병원에서 관절염이라 카네.“ 마른 나뭇가지 같은 할머니의 손을 잡아보고 나서는 길, 내려다보며 꼿꼿하게 걸어 지났던 동백터널을 다시 오른다. 땅을 향한 할아버지의 허리만큼 굽혀 333개 돌계단을 올랐다. 그러고 보니 참 낮은 곳에 집을 지으셨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水)! 사는 세상 어느 곳이든 고수가 있지만 언제나 내 두 손을 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시간’이다. 한 길을 오래 묵묵히 고개 숙여 ‘긴 시간’을 나아가는 사람들, 그 앞에서는 어떤 재주도 머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잠시 앉아 쉬던 공곶이 해변의 몽돌 쓸리는 소리, 내내 돌아오는 차 뒤를 따른다. 시간과 파도가 만들어 내는 단단하고 동그란 돌 부딪는.

평생을 행복하려면 정원을 가꾸라는 말이 있다. 내 생에 지상 땅 몇 평을 운이 좋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꾸며 볼까. 담장 허문 자리, 봄이 되면 하늘 구름 아래 눈처럼 내려앉은 수선화도 좋겠다. 아주 힘이 센 할아버지 웃음 닮아 짭조름한 소금기 어린 오래된 정원의 그 꽃.

<최영실 여행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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