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마당]바다에 봄이 오면
[에세이 마당]바다에 봄이 오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3.1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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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기 전 여명의 바다는 신비롭다. 구름인 듯 층층이 다른 빛깔의 수평선은 이내 점점 선명해지고 붉음이 짙어지면서 불쑥 해가 솟는다.

육지에 봄이 오듯 바다에도 봄이 온다. 한층 부드러워진 바다색은 겨울의 날선 푸른빛과는 사뭇 다르다. 냉철하게 우리를 맞던 이성의 겨울바다는 어느새 몸을 푼 산모처럼 자애로운 옥빛이 된다. 그리곤 겨울동안 품었던 생물을 마치 순산하듯 아낌없이 쏟아 내놓는다.

삼월 들면서 바닷가 사람들은 햇미역 수확에 바쁘다. 이른 새벽부터 바다로 나간 배들은 가까운 바다양식장에서 미역을 끌어올린다. 점점이 떠있던 배들이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쏟아놓은 미역이 아침햇살에 반짝일 때면 해초가 살아있는 생선처럼 퍼덕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낙들은 미역을 한 올 한 올 풀어 가지런한 모양으로 그물망 위에서 말리며 하루의 일상을 엮어간다. 해안길 산책에서 자주 만나는 행복한 풍경이다. 혹 날씨가 흐리거나 이른 봄비라도 내리는 날엔 집집마다 미역건조장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제때 말리지 않으면 물러지는 미역의 특성상 건조장 건조는 어쩔 수 없는 작업인 모양이다. 육지에서의 일 년 농사걷이가 가을철이라면 바다밭의 농사철은 이른 봄인 셈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풍기는 해초의 내음은 바다내음 중에서도 으뜸이다. 나는 이런 향을 맡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신비에 빠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물질이 순식간에 나의 뇌를 헤집고 들어와 잠식해버리는 느낌이다. 내가 아는 지인은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데 살고 있는 도심에서 일부러 자주 바닷가를 찾는다. 일상 중 문득 풋풋하고 비릿한 바다갯내가 울컥 그리워질 때는 그냥 차를 타고 혼자 바다를 다녀온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처음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분의 마음을 바닷가를 걸을 때마다 생각한다.

사람들은 추위가 풀리면서 바다를 더 찾아든다. 물론 겨울에도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지만 요즘은 벌써 주말이면 텐트를 치고 하루를 묵고 가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바닷가의 풍경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조망이 좋은 카페가 생겨나고 산책길(해파랑길)도 정비되면서 진풍경도 생겼다. 주말이면 관광버스가 바닷가 트레킹에 나선 사람들을 싣고 와서 부려놓는다.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개미처럼 줄지어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몽돌 위를 걷기도 하며 여유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TV에서 보게 되는 결사적 정치항쟁에 나선 사람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평화롭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서서히 풀린 봄바다의 모습에서 벌써 이른 여름을 예견한다. 바닷가 작은 커피집은 사람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 커피집 사장님은 서글서글하고 인상 좋은 젊은 아가씨인데 바쁜 일손에도 아마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바닷가를 지나는 자동차의 행렬도 만만찮게 늘었다.

그러나 지나는 자동차를 비켜갈 때마다 차를 조금 멀리 두고 바다의 향을 온 몸으로 만끽하며 걷는다면 더없이 상쾌하고 즐거울 것이란 생각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소음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서 코끝에 스치는 바다내음도 제대로 맡지 못한다면 봄바다를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한 손엔 향 좋은 커피라도 들고 한 손엔 정다운 사람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풀어진 봄바닷가를 걷는다면 이른 봄의 낭만으로선 최상일 듯싶다. 은밀한 수평선과 하얀 파도 그리고 싱그러운 해초향 가득한 바다에서 봄을 먼저 만나보는 건 어떨까.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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