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좀 들어 달라 하셨다. 민원 테이블에 마주앉자 술 냄새가 진동했고 양손에 든 요구르트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오후에 우리 학교 운동장에 산책 왔다가 축구하는 어린이들이 너무 예뻐 보였다고, 30대 중반의 아들도 우리 학교를 졸업했다고, 어제는 지갑을 못 챙겨 나왔기에 오늘은 일부러 음료수 사들고 다시 한 번 학교를 찾았는데 축구부 아이들이 없어 이렇게 행정실로 찾아 왔노라고….
“그러셨군요. 아들 졸업한 모교 후배들이 축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간식 사 주러 오셨는데 아이들이 없어서 서운하셨네요. 직접 전해주셨으면 더 좋으셨을 텐데. 내일 축구부 선생님께 잘 전달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못내 아쉬우신지 일어나시질 않으셨다.
그래서 사시는 집은 어디신지, 자녀분은 몇 명인지도 여쭈어 보았다. 작년 연말에 해운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했고 지금은 실업급여를 받고 있고 몇 달 더 쉬다가 다시 일을 할 거라 하셨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공부를 꽤나 잘했던 아들의 학업 뒷바라지를 잘 못해준 것이 아직도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다고, 어제 본 축구부 아이들이 꼭 내 아들 같은 생각이 들어서 간식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사실 어제도 행정실 문 앞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내 마음을 이렇게 알아주니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아드님도 대학 가서 좋은 직장 다니고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으시니 이제는 가슴에 맺힌 한을 푸셔도 되시겠다고 위로해 드렸다.
민원인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3월 바쁜 신학기 시즌의 업무전화 두 번을 놓쳤고 나를 찾아온 선생님 세 분이 그냥 되돌아 가셨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시간이 되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나는 평생을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당신은 교육자시니 더 열심히 학교를 위하여 일해 달라’ 던 할아버지 말씀을 되새기며 나는 오늘도 72년 전통의 초등학교 근무에 자부심을 느끼며 행정실 문을 힘차게 열어 본다.
<양소빈 농서초등학교 행정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