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의 ‘울산달리농악’을 기대하며
민낯의 ‘울산달리농악’을 기대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3.1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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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은 1936년에 일본인이 울산 달리(현 달동)의 다양한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모아 『울산과 達里-사진으로 남은 울산의 모습』(2014)을 펴낸 바 있다. 많은 사진 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환영잔치 모습’을 소개한 사진 6장과 농악패들의 모습 사진 4장이었다. 농악패들의 사진이란 ‘백의·흰 조끼 차림으로 소고를 든 남성’, ‘모자·백의·조끼 차림으로 장구를 어깨에 맨 남성’, ‘백의·흰 조끼 차림으로 꽹과리를 든 남성’, ‘백의·흰 조끼 차림으로 징을 든 남성’을 말한다.

지난달 25일 오후 3시부터 남구문화원 배꼽마당에서는 ‘울산달리농악보존회’ 창단공연이 펼쳐졌다. 서동욱 남구청장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필자는 보존회의 꾸밈없는 복원과 지속적인 성공을 기원하는 고사상에 첫 번째로 나가 큰절을 넙죽 세 번이나 올렸다.

“‘울산달리농악보존회’는 사라진 울산의 지역농악을 복원하고자 결성되었습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달리농악’이라는 깃발아래 악기를 치며 흥겹게 노는 영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말로만 전해지던 울산의 농악이 실존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울산 농악에 관심이 깊은 지역의 풍물인들이 모였습니다……”. (울산달리농악보존회 창단공연 팸플릿) 그 내용을 보면 ‘영상물을 근거로 한다’지만 농악보존회 창단의 목적과 이유에 대한 설득력이 다소 떨어져 보인다. 왜냐하면 울산에서는 영상물을 근거삼지 않더라도 농경사회 때부터 마을단위 지역민 농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지역에는 일반적으로 지신밟기가 있었다. 울산 동구 방어진 출신으로 동래야류, 동래학춤의 생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천재동(千在東·1915∼2007)옹의 울산 지신밟기에 대한 술회도 이를 뒷받침하기에 소개한다.

“「동래지신밟기」는 다 알고 있듯이 영남형이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점이 있기 마련인데 연습과정을 눈여겨보니 내 소싯적부터 보아온 놀이형태였다. 근교 밀양, 영산만 해도 장단, 풀이곡조, 놀이형태가 많은 차이점을 보이는데 울산에서 소싯적부터 보아 익혀져 있는 장단, 풀이곡조, 순서와 대열, 체제 등 모두가 동래지신밟기와 거의 100%가 같아서 작성을 맡을 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하에 반가이 받아들인 것이다.”(천재동,『아흔 고개를 넘으니 할 일이 더욱 많구나』, 2007) 내용을 살펴보면, 천옹의 21세 때 기억도 영상물 못지않다. 울산은 진법보다 지신밟기 형태의 농악 연희가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농악은 크게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으로 구분한다. 이때 좌도는 경상도 지역을, 우도는 전라도 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좌도농악은 주로 지신밟기 형태이며 우도농악은 진법이 특징이다. 현재는 지신밟기 형태보다 대부분 진법 위주의 전문농악단으로 연희한다. 마을농악과 전문농악의 차이점은 판제와 사설의 중심이 다른 점에 있다. 전문농악에서는 첫째마당, 둘째마당, 셋째마당 등 판제가 등장하며, 특히 진법이 발전했다. 마을농악에서는 집을 찾아다니며 대문, 부엌, 창고, 우물, 장독 등의 신을 찾아 지신을 울려(청배) 소원을 말하는 것이 중심이다. 마을농악은 좌도에서, 전문농악은 우도에서 발전했다.

달리농악은 순수농악이라기보다 농청(農廳)이 관장하던 일기계(日記契) 계원들을 중심으로 제초와 같은 공동작업, 공동농업의 차원에서 노동을 독려하거나 모임과 해산을 알리기 위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인용문은 1936년 8월 달리를 조사한 보고서 『조선의 농촌위생』의 내용이다.

“1936년 8월 6일 오전 7시 20여명의 농민이 ‘달리농기’를 들고 모여 있다. 긴 조선 나발을 계속 분다. 모인 사람은 모두 남자들이다. 대부분 일기계원과 그 머슴들이다. 고무신과 담배쌈지와 담뱃대, 바지를 우장에 싼 채 길가에 두고 호미, 가래 혹은 수금포만 가지고 4명에서 10명 정도씩 세 집단으로 나누어 8시 10분경 모두 논에 들어갔다. 1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논으로 간 집단도 있다. 논매기를 하는데, 작업 중에는 논매는 소리를 부른다. (중략) 점심식사나 해산 시에도 나발을 분다.”(『울산과 達里』-달리 조사와 1930년대 울산/허영란(2014))

인용 내용을 살펴보면, 논매기 공동작업에 달리농기를 앞세우고 긴 조선 나발을 분 것이 확인된다. 이때 나발의 기능은 모임과 해산을 알리는 소리도구여서 농악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울산농악대(1987년 창단?/울산문화원)의 활동 이야기와 병영서낭치기(2007년 창단/중구문화원)를 지켜봤다. 마을농악의 특징은 순수성의 전승에 있고, 전문농악의 특징은 시대적, 시의적 기교 변화에 있다.

울산 농악은 사설과 덕담 중심의 세시민속인 지신밟기로 미루어 마을농악의 범주에 속한다. ‘울산달리농악보존회’ 창단공연(2017.2.25/남구문화원) 또한 민낯이라기보다는 ‘분 냄새’가 더 난다. 울산달리농악보존회에 진정으로 바란다. 다른 지역의 농악을 흉내 내고 짜깁기하는 전철을 밟지 말고 울산 농악의 진실한 민낯으로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란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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