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롤모델 엘리자베스1세
정치적 롤모델 엘리자베스1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3.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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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8월 14일 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시선을 한 몸에 받는 16대 대선 후보가 출연했다.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고 당내경선에 뛰어든 박근혜 후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롤 모델((Role model)로 엘리자베스 1세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Queen Elizabeth Ι, 1533~1603)이라면 파산 직전의 나라를 구해낸 영국 여왕이었다.

박 후보는 엘리자베스 1세를 롤 모델로 삼은 이유를 거침없이 설명했다. “영국을 파산 직전에서 ‘해가 지지 않은 나라’로 만든 분이기 때문이죠. 어려서 고초를 겪었지만 그 시련을 이겨내고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습니다. 자기가 불행을 겪었기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늘 관용과 합리의 정신으로 국정을 이끌어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대영제국을 일으켰고요.” 자신의 이미지를 성공한 여왕의 그것에 오버랩 시키려는 시도로 비쳐졌다.

여기서 잠시 오류 하나를 걸러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숱한 식민지 개척으로 영국을 ‘해가 지지 않은 나라(The sun never sets on the British Empire)’로 만든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1세가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엘리자베스 1세는 동인도회사 설립과 중상주의 정책, 화폐제도 통일, 빈민구제법 강화 등의 정책으로 파산 직전의 영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에서 중용(Via Media)의 노선을 걸어 사회 통합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중도’, ‘통합’, ‘약자 배려’를 정책노선으로 내세웠고, 이러한 노선이 엘리자베스 1세와 닮았다는 분석을 나오게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2년 정치인 박근혜는 대망의 18대 대선 승리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또 한 번 화려하게 장식한다. 그러나 ‘중도’는 ‘우(右)클릭’으로, ‘통합’은 ‘분열’로, ‘약자 배려’는 ‘강자(재벌) 배려’의 모양새로 변질되고 만다. 특히 ‘선거의 여왕’이었던 그녀에게 이번에는 ‘불통의 여왕’이란 또 다른 시각의 별명이 붙게 된다.

2013년 12월 19일 뉴시스 기자는 “민주당이 19일 박근혜 대통령을 프랑스 왕정 당시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빗대며 소통 문제를 제기했다.”로 시작되는 기사를 전국에 띄운다. 박 대통령을 겨냥한 기사였다. 박수현 민주당 원내대변인이 현안논평에서 ‘요즘 인터넷에 불통의 아이콘 ‘마리 앙투아네트’를 패러디해서 ‘말이 안통하네뜨’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뉴시스 기자는 대선 당시 ‘문재인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박영선 의원의 글(‘1년 전을 돌이켜보며 반성을,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을’)도 같이 올렸다.

박 의원은 자신의 글에서 “독재와 불통의 망령이 대한민국을, 한반도를 감돌고 있다. 프랑스에 마리 앙뚜와넷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말이 안통하넷’이 있다는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쓴 소리를 이어갔다. “모든 것은 극에 달하면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정반합(正反合)의 세상 이치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구시대의 마지막 그림자에 가위눌려 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자는 영원할 수 없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판결을 예견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불행히도 ‘전(前)’이란 딱지만 붙인 채 청와대를 떠나게 된 정치인 박근혜. ‘비운의 영애’ ‘선거의 여왕’이란 별칭으로 국민들을 울리고 웃겼던 인간 박근혜. 요즘 언론매체들은 그녀에게 또 다른 수식어 헌정으로 바쁜 느낌이다. ‘극과 극을 달린 영욕의 정치인’, ‘헌정 사상 처음 탄핵으로 파면된 대통령’도 그 중 하나다. 그녀의 롤 모델 엘리자베스 1세는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역사에서 가장 현명하고 강한 군주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가장 백성을 사랑한 군주로 남을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에게 이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 것인지….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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