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 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
[이정호칼럼] 시인 윤동주와 청년문사 송몽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3.0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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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탄생 100주년이 되는 윤동주는 130편의 시를 남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다 잘 아는 윤동주의 <서시> 전문이다. 익숙한 시는 또 있다.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자화상>,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별을 헤는 밤>

지난해 이맘때쯤 영화 <동주>가 극장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마치 윤동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주곡 같다는 느낌이 든다. <동주>는 흑백영화이면서 어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거나 역사적 장면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말과 글도, 성명조차도 우리 것으로 쓸 수 없었던 암울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표출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주인공을 재단(裁斷)하지도 않는다. 그냥 윤동주가 남긴 시어들이 실오라기처럼 하나씩 풀어지면서 잔잔하게 몰입되도록 인도한다.

영화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윤동주보다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형이자 평생 친구였던 송몽규이다.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명동소학, 은진중학, 연희전문을 같이 다녔다. 다만 중학교 고학년 즈음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을 거쳐 광명중학을, 송몽규는 독립운동 언저리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와 대성중학을 졸업했다. 두 사람은 2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거의 같은 공간에 살면서 많은 것을 공유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신장이 훤칠하고 미남이어서 남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언어습관도 순후했다고 전한다.

필자는 송몽규의 약전(略傳)을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5년 전에 윤동주의 생가를 방문한 후 그의 존재를 알았고, 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량이 많았고,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윤동주, 문익환과 더불어 선두그룹을 형성했는데 그 중에서 언제나 으뜸이었다. 어린이 잡지를 서울에서 주문해 와서 그것을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하였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연극을 연출하는 등 활동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성격의 윤동주와는 무척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중학교에서도 문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호를 ‘문해’라 지었다. 마침내 그는 ‘송한범’이라는 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1935년에 콩트 <술가락>이 당선되었다. 약관에 못 미친 열여덟의 나이로 당당히 등단한 것은 그가 얼마나 문재가 뛰어났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송몽규의 빠른 문단 진입은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고, 이 무렵부터 윤동주는 그의 시작(詩作) 결과를 하나하나씩 쌓아두기 시작했다. 송몽규는 이처럼 정적인 성격의 윤동주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견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은 연전 시절에도 같이 활동했다. 윤동주도 1939년에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41년 6월부터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였는데 적극적인 성격에다가 능변인 송몽규가 주도하였다. 이때 윤동주는 <새로운 길>, <우물 속의 자상화> 등을, 송몽규는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 동인지도 압력이 있었던지 문우회의 해산과 함께 단명으로 끝이 났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전력으로 ‘요시찰인물’로 낙인이 찍혔지만 학업에 충실하여 졸업할 때 성적 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송몽규의 작품은 세 개가 전해진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나 등단 작품인 콩트와 연희전문 시절의 시 두 편이 그것이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 홀로 밤 헤아리는 이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다 휘파람을 분다.”<밤>, “……푸르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 오 하늘아/ 모든 것이/ 흘러 흘러갔단다.……”<하늘과 더불어>

두 사람은 1942년 이른 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18개월 후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에 걸려들었다.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교토에서 한 번씩 만나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던 대화를 꼬투리로 삼은 것이다. 1945년 2월 16일에 윤동주가, 3월 7일에 송몽규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북간도에 무덤을 쓰면서, ‘시인윤동주지묘’, ‘청년문사송몽규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윤동주는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로 인해 별이 되었다. 오늘 72주기를 맞은 송몽규도 이제 함께 별이 되어 후학들의 가슴에 오래토록 쌍별로 빛날 것이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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