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전 일본인들이 본 울산
85년 전 일본인들이 본 울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2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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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이 깊다. 일반민중의 지식수준이 낮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울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당시 울산 사람들의 단점 가운데 첫 머리에 꼽은 점이다.

단점은 계속 나열된다. ‘가정이 무미단조하다.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다’, ‘주택이 실용적이지 않다’, ‘부인의 권리가 낮다’, ‘부권의 전횡이 있다’, ‘주부의 교양이 부족하다’, ‘무계획적으로 빚을 진다’ 등이다.

약 85년 전 일본인들은 우리를 이렇게 진단했다. 물론 그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치욕감이 들 정도로 아찔한 진단이다. 그러나 부정하기도 어렵다.

1933년 일본인들로 구성된 울산군교육회는 ‘울산군향토지(蔚山郡鄕土誌)’를 펴냈다. 향토지는 일본어로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용케도 남아 있었다. 울산에 살고 있는 윤대헌씨가 2002년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서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다. 이 향토지를 최근 울산대곡박물관이 우리말로 번역해 학술자료집으로 발간했다.

향토지는 울산 사람들의 단점만 기록하지는 않았다. 장점도 소개돼 있다. ‘조상을 잘 섬기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두텁다’, ‘이웃 간에 서로 돕는 풍습이 있다’, ‘연장자를 공경한다’, ‘가난한 사람을 잘 돕는다’ 등이다.

이 점들은 지금도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상으로 잘 언급하고 있다. 유교적 전통이 일본보다는 깊은 한국의 당연한 특성일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버스나 전차에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럴 수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이다. 일본에서는 노약자 지정석마저도 태연히 점유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힘들지 않게 볼 수 있다.

명치유신(1868년) 이후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할 만큼 성장했다. 청과 러시아를 차례로 꺾고 극동의 맹주로 등장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식민지배하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한 종주국민의 지위에 있던 당시 일본인들이 바라본 조선인들의 모습이 서두에 열거한 점들이다. 우리로서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조선의 권력은 노론 세력이 독점했다. 노론은 왕권까지도 힘으로 제압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방은 탐관오리들의 세상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이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800년 정조가 49세에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 왕권은 아예 없었다. 세도정치의 폐단은 극에 달했다. 민생은 피폐해졌고 국력은 소진했다. 그렇게 한 세기를 지나던 사이에 일본은 일어섰고 조선은 주저앉았던 것이다.

섬나라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왜인들은 지배자로 이 땅에서 군림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절대 다수가 빈곤에서 허덕일 때 교육받을 기회를 얻기도 힘들었다. 1931년 울산에 살던 일본인 아동들은 전원이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학령기 조선인 아동들은 18%만 보통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일본인 당국자들은 인구의 2.35%였던 일본인을 위해 울산에 소학교를 6개 운영하고 있었다. 나머지 조선인을 위해 운영한 보통학교는 18개에 불과했다. 대체로 1개 면에 1개 학교가 있었던 것이다.

굴욕의 역사였다. 그 단면이 ‘울산군향토지’에서 읽힌다. 지금 우리 손으로 향토지를 쓴다면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 자못 긴장된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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