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편지]고향의 봄
[주막편지]고향의 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22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에도 아랑곳없이 약속처럼 봄이 왔다.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온 계절은 그저 곱고 순박하기만 하다. 다시 시작이다. 마을에도 생기가 돌고 부산스럽다. 까치는 집짓기가 한창인 가운데, 겨우내 자취를 감추었던 찌르레기 가족도 돌아왔다. 비둘기며 직박구리, 딱새, 참새, 뱁새 등 텃새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곧 둥지 틀 곳을 마련하고 짝 찾기에 나설 것이다.

바쁘기는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향기를 내뿜으며 벌을 불러들이는 매화를 시샘하듯 산수유의 호흡도 가빠졌다. 지난 태풍에 허리가 꺾였던 갯버들도 고운 솜꽃을 피워 올리는 걸 보아 건재해 보인다. 이어 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복사꽃, 배꽃, 산벚꽃이 온 마을을 환하게 수놓을 것이다.

이제 농번기의 시작이다. 잠시 휴식에 들어갔던 경운기와 트랙터가 기지개를 켜며 요란하게 마을 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밭갈이와 논갈이에 앞서 우선 거름을 나르는 일이 급선무인데,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소똥냄새는 풍요를 약속하는 향기처럼 느껴진다. 이 모두가 축복 같다.

그러나 다시 봄이 오기까지 힘든 일도 많았다. 지난 가을 추수를 앞두고 들이닥친 태풍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조류독감 폐해로 애지중지 키우던 닭, 오리를 생매장해야 하는 아픔도 겪었으며, 얼마 전에는 구제역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아직 그 때의 상처가 말끔히 씻어지진 않았지만 다행히 마을은 퍽 안정적이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유실된 하천 주변의 전답도 거의 복구 단계에 이르러 농사짓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하천은 더 넓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심지어 침수로 못 쓰게 된 세간은 새 것으로 바뀌어 집안이 훤하고 편리해졌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반가운 소식도 줄을 이었다. 오랫동안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던 L어른이 기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거기다 새벽부터 마을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일을 자처했다. H후배의 염소가 보기 드물게 새끼를 한꺼번에 네 마리나 낳았는데, 걱정과는 달리 모두 무럭무럭 잘 크고 있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대처로 떠돌던 K형이 가족을 데리고 귀향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 여의고 중학교도 진학 못하고 남의 머슴 노릇하다가 야반도주한 후 일체 소식이 끊겼던 그였다. 그런 그가 번듯하게 성공하여 고향에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 못했었다. 어쩌면 긴 세월 속에 다들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오자마자 마을에 거금을 발전기금으로 쾌척했다. 마을에서는 어렵게 번 돈이고, 그동안 무심하기까지 했는데 받을 수 없다며 사양했지만, ‘고향, 하나만으로 삶의 밑천이었고 원동력이었다’며 오히려 지난날에 고향에 진 빚이 많다고 했다.

지금 그는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짓는 중이다. 옛 추억이 사무쳐서 옛집 그대로 살리고 싶었지만 워낙 낡아 헐 수밖에 없어 아쉽다고 했다. 집 짓는 내내 마당 한 켠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소고기국을 끓여, 오는 사람마다 술과 함께 따뜻하게 대접하는 그와 가족의 모습은 늘 진한 감동이다.

올봄에는 잠시 바쁜 일손을 틈타 전세버스를 대절해 관광을 다녀올 계획이다. 이번에는 마을에서 자체 경비를 충당하고 K형 가족을 초청하는 형식이다. 물론 L어른도 모시고 갈 것이다.

필자가 귀향한 지도 만 7년이 지나고 있다. 혹자는 너무 일찍 들어온 건 아닌가 하지만, 내 선택은 옳았고 현명했다. 나는 귀향 후 세상을 다시 배운다. 사람과 자연은 나를 늘 전율케 한다. 그 속에 나날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버려야 비로소 보인다고 했던가. 비우는 만큼 채울 수 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가 너무 고맙다. 산짐승의 울음과 발자국까지……. 모두 스승이다.

김종렬 시인/물시불 주막 대표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