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경계의 땅 북간도에 실재했던 명동촌
[이정호칼럼]경계의 땅 북간도에 실재했던 명동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20 2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가을에 시작된 ‘말의 성찬(盛饌)’이 넉 달째 진행형이다. 등장인물들이 태블릿 PC, 비밀녹취록, 업무수첩, 블랙리스트 등을 둘러싸고 마치 거짓말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탄핵 정국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은 불쾌감을 넘어 분노의 감정까지 든다. 이런 판국에 촛불과 태극기는 집단을 형성하면서 서로 자기네들은 나라 걱정이 되어 죽겠는데 저 인간들은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난리다. 이로 인한 피로감은 찬반 양쪽 공히 무척 클 것인바, 필자의 가슴에 늘 신선한 울림으로 남아있는 명동촌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1899년 2월 18일에 함경도 북단 선비 가문 25세대 141명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이 온종일 걸어서 이삿짐을 푼 곳은 미리 사들여놓았던 너른 황무지였다. 용정까지는 30여리가 못 미치는 선바위 아래 구릉의 너른 땅이었다. 소 한 마리가 천일을 갈 정도의 땅인 천일 경(耕, 600만평)을 공동구매하여 투자한 비례대로 나누어가졌다. 이 땅이 모두 개간되면 수천 명의 생활이 가능할 만큼 거대한 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 1%인 십일 경을 학전(學田)으로 남겼다. 거기서 나오는 소득으로 교육에 쓸 요량이었다.

집단지성의 용기 있고 치밀한 계획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남평문씨 가문 40명, 전주김씨 가문 31명, 남씨 가문 7명과 김해김씨 가문 63명 등 종성과 회령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듬해에 파평윤씨 가문 18명이 합류함으로써 5대 가문 사람들이 이상적인 마을공동체를 꿈꾸며 조성한 북간도 명동촌이었다. 실학을 지향하던 학자들이 손수 노동에 나서자 계획대로 황무지가 빠르게 개발되었고, 물산이 여유로워졌다. 곧이어 불과 몇 년 만에 천여 가구의 조선인들이 다섯 가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문병규, 남종구, 김하규, 김약연 등 집단이주의 지도자들은 모두 관북지방 실학풍의 한학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맹자를 만독(萬讀)했다는 32세의 규암 김약연이 중심인물이다. 좌장은 환갑이 넘은 문병규였지만 이주 초기에 세상을 떠났고, 가장 젊지만 규암의 인품과 리더십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김정규, 문정호, 문치정, 윤하현, 남위언 등이 명동촌의 초기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의 아들들인 김정근, 윤영석, 윤영춘, 김석관, 김진국, 문재린 등이 대를 이었다. 이들은 마을의 행정과 질서, 교화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주 초기 10년 동안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이상촌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황무지는 빠르게 농경지로 바뀌었으며, 땅은 배반하지 않았다. 조선인 고유의 관혼상제나 세시풍습이 이어졌고, 미풍양속이 유지되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개척기 초기부터 서당을 열어 교육에 힘쓰던 중 마침내 신식교육을 시작했다. 1908년 4월에 김약연은 용정에서 폐교된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받을 명동서숙을 세웠다. 박무림 초대숙장을 모시고, 서당 학동 등 42명의 학생을 모아 개교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용암동으로 불리던 마을이 ‘명동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김약연이 교장을 맡아 본격적인 신학문 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1910년에는 명동학교에 중학부가, 1911년에는 여자소학교가 개교되었다. 학교는 학전에서 나오는 소득을 투입함으로써 교육비 부담을 최소화하고, 우수 교원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이에 따라 교원들은 대개 민족의식이 뚜렷한 진보적 지식인들이어서 학교의 명성은 점차 높아갔고, 학생들도 간도 각지와 함경도, 연해주 등지에서 모여들었다. 마을마다 열리던 야학에는 가뭄에 단비 같은 배움이 이어졌다.

학교는 1910년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기독교인인 ‘정재면’ 교사가 부임하면서 학교와 교회는 변화의 중심이 되었다. 강고하던 유학자들이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렇게 10여년을 이어가던 학교는 1920년 가을의 경신대참변에 크게 위축된 이후 사회주의가 만연하면서 1928년에는 명동소학교를 끝으로 3개교에서 87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시키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이후 치안에 위협을 받은 명문가들이 용정으로 이사하면서, 명동촌의 마을공동체는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명동촌은 그렇게 소멸되고 말았지만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졌다. 명동학교가 배출한 많은 인재들이 독립운동가로, 사회지도자로, 종교지도자로 기여했다. 해방 후 명동촌 사람들 일부는 동서남북으로 흩어졌지만 다수는 공산주의를 피해 서울에 정착했다. 조국도, 타국도 아닌 경계의 땅에 세상 악마는 온통 다 나와서 득실거리던 그 시대를 살다간 선인들의 의지에 찬 삶에 경의를 표한다. 불안한 국면에 처한 지금의 대한민국도 간난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와 희망을 예단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온다면 불역쾌재(不亦快哉), 누군들 기뻐하지 않을쏜가.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