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이야기 셋
처용, 이야기 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1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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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악(樂)의 개념은 노래와 춤 그리고 연주를 통칭하는 가무악(歌舞樂)이다. 국가 혹은 왕실의 행사에는 장악원 소속의 공연자가 가무악을 정재(呈才)한다. 어전 전용 행사의 정재를 장원급제자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잔치인 영친연(榮親宴) 혹은 과거급제 60주년을 맞은 회방연(回榜宴) 등에 임금이 개인에게 내려주는 가무악을 사악(賜樂)이라 한다. “사악 일등 악사 1인·전악 2인·악공 20명·무동 10명·처용무 5명·색리 1인(賜樂一等樂師1人典樂2人樂工20名舞童10名處容舞5名色吏1人)” 『六典條例(1687, 고종3년)』

육등조례에 기록된 일등에게 내려준 사악의 사례(事例)이다. 처용무(處容舞)가 1등 사악(賜樂)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춤이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악학궤범(1493)’에는 사악 등급이 4등급, 육전조례에는 2등급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처용무는 육전조례에서 1등급에만 적용하고 있다. ‘처용, 이야기 셋’은 처용할배 보러온 월하 스님, 처용탈 깎는 무호(無號), 처용무 이수자 박문연 이야기다.

1995년 3월 2일부터 12일까지 울산 ‘MBC 학성화랑’에서 김현우(金玄佑.1955)의 「處容 얼굴 찾기」 처용탈전이 열렸다. 1995년 3월 9일 오후 통도사 월하 스님(1915∼2003)은 주지인 목산 지은 스님(전 백양사 주지)과 함께 전시실을 찾았다. 방명록에 ‘祝賀할 展示 通度寺 方丈 老天 月下’라고 적었다. 김 작가를 대면하고는 “신문을 보고 처용할배를 꼭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했다고 전한다. 전시실에는 처용탈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 까지 다양했다. 돌아가면서 구경하던 방장 스님이 크기가 작은 처용탈을 선택했다. 그러자 함께한 주지 스님이 “이왕이면 큰 것을 하시죠” 하면서 길이 70㎝, 폭 50㎝ 정도의 제일 큰 처용탈을 선택했다. 22년 전의 일이지만 김현우는 그 덕에 수입도 꽤 좋았다고 말했다. 사연이 있는 처용탈이라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사를 찾아 월하 스님이 구입한 처용탈에 대한 자료를 문의했다. 결과는 미등록이며 행방은 불분명했다. 월하 스님은 필자의 은사 스님이다. 은사 스님의 생전 일화이기에 관심이 있어 소개했다.

처용탈방 주인 김현우는 태생이 경북 영주다. 1979년 울산에 왔다. 오기 전까지 영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성장하여 글을 쓰고 신문지국을 했다고 말한다. 울산에 와서는 금속회사와 목재회사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의 처용단장(處容斷章)을 읽고 처용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 후 신정고 학생들이 추는 처용무에 관심을 두었다. 1991년부터 그는 스승도 없이 처용탈을 깎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정동 처용의 집, ‘처용탈방’이 시작된 것이다. 처용탈을 깎기 시작한 것은 목재회사에 다닌 것이 마중물이 됐다고 한다. 목재회사 목수들의 여러 가지 재능적 작업을 따라도 해보고 어깨 너머로 배웠다고 한다. 이후 그는 타고난 소질과 어깨 너머로 배운 목수의 기능과 견문(見聞)을 보탰다. 필자가 ‘반야학가(般若鶴駕)’ 제작을 위해 처용탈방을 자주 찾을 때마다 묻고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이제 온통 흰머리로 변해버린 스승 없는 처용탈쟁이 무호는 지난달 21일 26년간 중구 시대를 접고 남구 달동 시대를 다시 열었다.

울산에는 처용무 이수자 중 여성도 몇몇 있다. 박문연(朴文蓮,1959)은 그 중 한 사람으로 활동의 중심에 있다. “관습도감(慣習都監)에게 전지하기를, 이 뒤로 처용무(處容舞)에 기생을 그만두고 남자 재인을 쓰라(傳旨慣習都監:今後處用舞 除女妓, 用男夫)”(세종실록 99권, 세종 25년 1월 25일 신사 2번째 기사/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전교하기를, 처용무(處容舞)는 전대의 유풍(遺風)으로 지금도 마땅히 써야 할 것이니, 기녀들에게 가르치고 연습시켜 한결같이 연향 때에 사용하도록 하라(傳曰處容舞前代遺風 今所宜用 令妓傳習 一應宴享時行用)”(연산군일기 56권, 연산 10년 12월 13일 기사 3번째기사/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실록에는 처용무를 출 때 여성을 금하기도 하고 활용하기도 했다. 사실 처용무의 복식이 무겁고 춤사위가 동적이기 때문에 여성은 부담이 되기도 한다.

박씨는 울산 토박이로 어릴 때부터 처용설화와 처용암을 듣고 보며 자랐기에 가슴속 한켠에 처용무를 반드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단다. 2009년 울산문화원연합회 주관 ‘처용 전수학교’지원자 31명 중 한 사람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 후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국립국악원을 오가며 처용무를 연수하여 2014년 2월 처용무 이수자가 됐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신정고등학교 처용무반을 맡아 지도하고 있다. 2014년도에는 비영리단체인 ‘울산처용무전승회’를 창립하여 회원 35명의 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이진호 처용무 전수 조교를 강사로 초빙하여 ‘울산 처용무 전수생’을 양성하는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2016년 8월부터 3개월마다 처용암 청소를 실시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울산시가 ‘2017년 울산방문의 해’를 선포했다. 볼거리에 처용탈과 처용무를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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