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칼럼] 색소폰 배우기
[김태규 칼럼] 색소폰 배우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1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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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 부부는 아침부터 분주히 서두른다. 아내는 탁구장으로 나는 색소폰 학원으로 발걸음이 바쁘다. 퇴직 후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해야 하나? 골몰을 하다가 어렵게 선택한 것이 색소폰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집 근처의 색소폰 학원을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선뜻 결심을 굳힐 수 없었다.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아내와 같이 학원을 찾았다. 아내는 나의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나 자신도 ‘내 나이 70이 코앞인데… 늙은 감각으로 정밀한 악기를 다룰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을 하면서 등록을 했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85세의 나이에 3천200m 상공에서 스카이다이빙을 멋지게 해냈다. 그는 “자유낙하의 희열을 느끼고, 노인도 활동적으로 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스카이다이빙에 나섰다. 90세에 또 도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멋있는 노익장인가. 그렇다 내 나이 아직 70도 못 되었는데 나도 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학원생들 중에서 내가 두 번째 고령자였다. 젊은 선배들이 어려운 결심을 했다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내가 색소폰을 배우기로 결심한 저변에는 어릴 때부터 뇌리에 각인된 색소폰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뒷산으로 소를 먹이러 가면 옆 마을 친구의 형이 가끔 나팔을 불었다. 그 형은 참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라 기타, 손풍금, 나팔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 고운 노을 속에서 나팔을 부는 그 모습이 나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고 말았다. ‘나도 언젠가는 나팔을 한 번 불어봐야지…’ 다짐을 하기도 했다. 그 때 형이 불었던 나팔이 지금 알고 보니 알토색소폰이었다.

색소폰은 1846년 벨기에의 아돌프 색스가 만들었다. 그 종류는 알토, 테너, 바리톤 등 일곱 가지가 있다. 그러니 넓은 음역(音域)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사람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소리를 낼 수 있다. 그 소리는 화려하고 박진감이 있으며 흐느끼는 듯한 저음으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악기이다.

2015년 3월. 내 악기 테너를 구입하고 본격적인 학습에 돌입했다. ‘젊은이들보다 몇 갑절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기초 10단계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이 연습은 계명을 익히고, 소리를 구별하며 호흡과 운지법을 익히는 과정인데 보통 3개월이 소요된다고 한다. 7번까지는 어려움 없이 잘 넘어가 ‘색소폰도 별것이 아니구나’ 했는데 8번부터 무척 어려웠다. 등산을 할 때 정상이 가까울수록 더 힘든 것과 같다. 매일 3시간을 선 자세로 연습을 하자니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저려 온다. ‘내가 괜한 일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이것이 처음 맞는 고비인 듯하다. 그럴 때마다 멋있게 색소폰을 불던 고향 형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려움을 이기고 기초과정 10단계를 마쳤다.

드디어 기초음악의 악보를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흘러간 옛 노래를 배우면 재미있게 진도가 일사천리로 나가겠지…’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원장님은 “노래는 노래대로 어려움이 있다”고 조언을 한다. 기초과정에서 배운 대로 정확한 계명을 읽으면서 운지를 해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가사를 부르면서 운지를 하니 정확한 음이 나오질 않는다. 이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문제다. 또 박자를 정확히 읽어야 하는데 이것도 대단히 어렵다. 음악교육을 12년이나 받았지만 음표와 쉼표에 이렇게 어둔하니 우리의 음악교육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덧 첫 야외 연주회 날짜가 잡혔다. 지금부터 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나와 같은 햇병아리들은 무대 경험을 쌓는 훈련도 해야 한다. 학원의 20cm 높이의 무대에 올라 그간 연습한 곡을 독주해야 하는 훈련이다. 속으로 ‘반평생을 교단에서 보냈는데 저런 작은 무대 연주가 뭐 그렇게 어려울까?’ 만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무대에 오르니 손이 떨리고 눈앞이 하얗게 되어 악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첫 무대 독주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가을 연주회 날이 되었다. 온 가족들과 친구들이 공연장으로 속속 모여든다. 손자들이 꽃다발까지 준비한 걸 보니 할아버지의 멋진 연주를 기대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동안 열심히 한다고 했다. 노익장이라는 격려도 많이 받았다. 유니폼을 멋지게 차려입고 내 차례를 기다리는데 목이 마르고, 자꾸만 호흡이 빨라진다. 어린 시절 운동회 때 달리기 순서를 기다리던 그 심정이다. 그간 응원을 해준 아내와 딸 내외 손자들에게 멋있는 연주를 선보여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가락이 떨려온다. 내 차례가 되었다. 많은 관중들이 머리가 하얀 늙은이가 어떻게 연주를 하는지 유심히 노려보는 것 같다. 1절은 그런대로 불었는데 2절은 호흡도 부정확하고, 박자와 음정이 불안스레 끝나고 말았다. 그래도 손자들은 “할아버지 최고”라며 꽃다발을 안겨준다. 그렇게 나의 첫 연주회는 끝났다.

독일의 니체(F.Nietzsche)는 “음악을 모르는 삶은 실패한 인생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와의 친교를 통해 얻은 냉철한 결론이다. 화려한 비단옷에 왕관을 쓰고 박물관 진열장에 갇혀있는 왕이 부럽지 않다.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것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이 아닌가?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즐기면서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숙달이 되겠지…. 열심히 하는 자보다 즐기는 자가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원장님은 좌절에 빠질 때는 미숙했던 처음을 생각하라고 늘 조언을 한다. 그렇다. 내가 봐도 처음보다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있다. 오늘은 또 다른 곡목을 배우는 날이다. 나의 색소폰이 있는 낙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김태규 울산수필가협회장, 전 메아리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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