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추억
나팔꽃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0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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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아버지는 대구의 어느 방직회사 전기엔지니어였다. 그 당시에 전기엔지니어라면 대단한 기술소지자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때에는 추억어린 일들이 많았다. 사는 곳은 대구 중심지여서 논밭 같은 농토는 없었다. 그 대신 큰 방직회사가 서너 개 있어 회사원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나도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택’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개구쟁이같이 재미난 생활을 보냈다.

그 사택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크기는 잘 모르겠지만 사택 안에는 운동장이 하나 있었다. 어릴 때에는 꽤나 컸었다. 10여년이 흘러 한번 찾아가 보았는데 너무나 작아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모양이 네모나게 되어 있어 동네 아이들이 놀기에는 최고의 안성맞춤이었다. 구슬치기, 땅따먹기, 야구시합 등 놀이가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유난히 야구를 재미나게 했던 것 같다. 어린아이들끼리 하는 시합이라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투수, 포수, 유격수 등 야구의 포지션은 다 갖추어서 했다.

사택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제일 안쪽 줄은 간부급 이상이 살고 있었고 다섯 걸음 건너 앞줄에는 과장급이, 운동장 아래편 줄에는 계장급이 가지런히 나누어 살고 있었다. 나머지 부하직원들은 지붕 하나로 길게 이어진 공동숙소 같은 곳에서 옹기종기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욱이 사택 오른편에는 제법 큰 농토가 있었는데 사원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릴 때 생활은 도시 반 농촌 반이었다고 해도 될듯하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살 많은 이혁주라는 키 큰 친구가 문득 생각난다. 둘도 없는 친한 친구라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혁주의 아버지 직책은 재미나게도 같은 회사에서 자재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같이 학교에 가는 날이면 그의 손에는 늘 노랗고 기다란 ‘바나나’가 쥐어져 있었다. 딱 두 송이였다. 하나는 내 친구 혁주 것이고 또 하나는 내 것이었다. 당시 바나나는 엄청 비싸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고귀한 과일이었다. 노란 껍질을 길게 쭉 벗기고 한입 잘라 먹으면서 학교에 가는 맛이야말로 정말 환상적이었다. 매일 매일 혁주와 같이 학교에 가는 일이 어린 나로서는 최고의 즐거움이었고 행복이었다.

그뿐인가. 나의 반에 이성원이라는 여자아이도 같은 사택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과장급이었다. 한때는 책을 서로 빌려주기도 했는데 좀 서먹서먹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공교롭게도 친구 혁주와 4촌간이어서 나로선 더욱 좋았다. 그보다 성원이의 얼굴 모습은 늘 빨간 나팔꽃같이 해말갛게 통통하고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아마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선지 시간만 있으면 괜스레 그 아이 집 대문 앞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재미로 했다. 열려 있는 대문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면 혹시나 그 아이가 집 꽃밭에서 나팔꽃을 보고 있을까 해서였다.

그럴 때면 바지런히 성원이의 엄마가 꽃밭에서 물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린마음에 속이 상했는지 시무룩해지기 일쑤였다. 무심코 성원이의 엄마와 눈을 마주치면 “얘! 원호야! 지금 어딜 가니?”라고 명랑스레 물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그 엄마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사 온 순수한 서울토박이 말씨를 쓴 것이다. 거기다 내 이름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나에게 한 서울 말씨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당시 성원이 집 뜰에는 나팔꽃을 비롯하여 채송화, 맨드라미 등 많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빨간 나팔꽃이 해말갛게 피어 있던 성원이의 꽃밭을 정말 잊지 못한다. 다가오는 신학기 울산으로 강의 가는 길에 대구에 한번 들러야겠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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