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후유증과 변화의 물결
명절 후유증과 변화의 물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0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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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큰 명절인 ‘설’의 연휴가 지났다. 귀성객들은 고향의 가족·친지들과의 즐겁고 행복했던 만남을 뒤로 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으리라. 고향 떠나 독립된 가정을 이루었거나 타향에서 홀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귀성은, 더 없이 아름답고 훈훈한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필자는 20년 전 고향 울산에서 선친이 돌아가신 뒤부터 명절 차례와 기제사를 서울에서 모시고 있다. 예전처럼 귀성의 교통 대란(?)을 겪지는 않지만 명절 연휴 동안 아련히 피어오르는 향수를 애써 달래야 하는 허전함에 젖기도 한다. 귀성객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이래저래 명절은 고향의 소중하고 따뜻함을 가슴 깊이 느껴보는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도 잠시, 명절 연휴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명절 후유증’이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주부들은 여전히 명절 음식 준비로 분주하다. 게다가 아직도 많은 주부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시댁을 오가느라 교통체증까지 겪으며 무거운 피로를 호소한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따른 명절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몇 해 년 전부터 제사나 차례 음식 즉, 제물의 간소화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숱한 망설임 끝에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막상 해를 거듭할수록 주변인들로부터의 호응도 높아져 가니 후회할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까지에는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서울대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가 쓴 칼럼과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2013년 모 일간지에 ‘제사를 회상함’이란 제목으로 쓴 칼럼에서 송 교수는 우리의 미풍양속인 제사 문화의 불합리성을 잘 지적해 냈다. 특히 차례나 기제사를 위해 준비하는 제물의 과다함이 현대에 이르러 얼마나 불합리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그 칼럼에서 송 교수는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중략)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조선시대부터 과열된 이른바 ‘제례 경쟁’을 따갑게 지적했다. 또,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하며,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 잔이면 족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송 교수의 이러한 주장을, 아직도 일부 계층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고향 울산에서 종가의 장손으로 태어나 엄격한 유교 사상으로 무장(?)된 집안에서 자라난 탓에 제물 간소화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맞지 않는 문제점이 하나 둘 불거지자 심사숙고 끝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대가족을 이루던 농경시대도 아닌 핵가족 시대에, 가짓수 많은 제물을 장만하는 데에 따르는 일손 부족과 한 달 걸러 닥치는 제사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도 작용했다. 게다가 명절 차례나 기제사를 지낸 뒤 거의 절반쯤은 음식 쓰레기로 배출되는 폐단 등은 마침내 필자가 간소화의 결단을 내리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가족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화목을 도모하는 우리 고유의 명절이 국민들의 생활에 불편함과 불합리함을 안겨준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명절을 맞이하는 인식이나 패턴을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선해 보려는 노력이 꼭 필요한 시점이 온 것으로 본다. 시대의 흐름이란 바로,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물결’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제물의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다. 그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2017년의 오늘이다.

김부조 시인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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