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칼럼]어머니의 손가락
[김태규 칼럼]어머니의 손가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1.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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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난다.

그럴 때마다 가위에 눌려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깬다. 어머니가 행주치마에 손을 감추고 떨고 있는 모습과 함께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선잠이 깨어 어머니 생각으로 잠을 설치고 만다.

내가 12살 적 어느 설밑이었다. 설이 다가오면 여유 있는 설을 보내기 위해 소여물을 한꺼번에 많이 썰어서 창고에 쌓아두었다. 이런 날이면 아버지께서 작두날을 갈아 잘 들게 해 놓는데, 그날은 공부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 어머니와 여물을 썰어야 한다.

어두운 창고에서 여물을 써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짚에서 나는 먼지로 머리와 얼굴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되고, 목덜미로 들어간 까끄라기로 온 몸이 간지럽다. 눈, 코로 들어가는 먼지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 도 없고, 눈을 바로 뜰 수도 없다. 이 생지옥을 벗어나려고 작두를 누르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골목에서는 단짝들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다. 귀를 나팔 통같이 벌려놓고 반쯤 감은 눈으로 정신없이 작두를 눌러대는데, “아이 쿠”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머니가 짚더미 속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창고 문을 박차고 보니 어머니의 팔목에서 선혈이 햇살 속으로 선명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를 부축해 마루에 눕혀 놓고 “사람 살려라!”고 집밖으로 나와 외치니, 앞 논에서 일하시던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달려왔다. 나는 마당에 퍼질고 앉아 벌벌 떨면서 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어른들이 나를 꾸중이라도 할까봐 “애 놀랜다”고 하면서 나를 달랬다.

마침 마을의 배추를 실러 온 트럭으로 급히 부산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치료가 잘 되기를 조바심치며 마을 어귀에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밤늦게야 오셨다. 어머니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으나 팔에는 온통 붕대를 감아 어깨끈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는 괜찮다. 저녁은 먹었느냐?”며 오히려 내 걱정을 하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날의 사고는 작두 앞에 채인 여물을 밀어내려고 어머니의 오른손이 작두날 위로 들어온 것도 모르고, 조심성 없이 작두를 마구 눌러서 생긴 사고였다. 설이 지나고 병원에서 꿰맨 실을 뽑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굽혀지지가 않았다. 아마도 급히 수술을 하면서 잘못된 것 같았다. 어머니의 나이 서른넷, 이때부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삶이 시작되었다.

동지섣달 냇가에서 얼음빨래를 해 머리엔 큰 대야를 이고, 시린 손을 행주치마 속에 감추고 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그 많은 일꾼들의 식사와 새참 준비가 힘에 벅찼고, 산더미 같은 빨래를 혼자서 하시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때마다 ‘저 많은 빨래를 좀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면서 통속의 빨래를 밟아드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밤새 아픈 손목을 주무르며 잠을 못 이루고, 날씨가 흐린 날은 손목이 쑤셔 뜨거운 물수건을 감기도 했다. 가끔 어머니의 굽혀지지 않는 손가락을 만져보면 차갑고 색깔도 푸르스름해 보였다. 이런 어머니의 손을 보고 철없는 동생들은 “권총 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열아홉에 아버지와 결혼해 홀시어머니 밑에 줄줄이 달린 범 같은 시동생 넷을 뒷바라지하신 그 고생을 어찌 말로 다 하랴! 집안의 맏며느리로 못 본 척, 못 들은 척, 말 못하고 지나온 세월 동안, 나약한 체구에 황소 일을 불편한 손으로 다 하시며 살아온 어머니의 고된 삶을 내가 어머니보다 더 살고 보니 지금에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오면서 오직 근검, 절약의 알뜰한 삶을 사셨다. 내 기억엔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항상 꼭두새벽부터 분주히 일을 하셨다. 그 덕분에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집을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농으로 일구셨다.

한국 전쟁 후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더 높았던 시절, 부모님 덕택으로 배곯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내면서도 내가 원하는 비싼 교복을 사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이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 힘이 다하셨는지 환갑 되는 해에 소천(召天)하시고 말았다. 아내가 박봉을 쪼개어 여행을 보내 드리려고 든 적금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주자(朱子)는 ‘부모 생전에 불효하면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고 가르쳤지만 그때는 귓등으로 들었는데, 뒤늦게 마음 아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가끔 고향에 갈 때마다 약간의 용채를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 한 것으로 여겼다. 고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와 함께 번듯한 식당에서 식사 한 번 못 한 것이 이렇게 마음에 두고두고 걸릴 줄이야….

1984년 마산의 H학교에 근무하던 팔월 초이튿날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어머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큰 아들이 왔다’고 소리를 치니 숨이 곧 넘어가면서도 환하게 웃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꽂혀 있다. 절명의 순간에도 이 못난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시다 운명하셨다. 고향에는 아직도 연세가 더 많은 분들이 살아 계신데 그렇게 속절없이 떠나시다니….

이승에서는 이 자식의 잘못으로 불편한 손을 감추고 살았지만, 저승에서는 예쁜 손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행주치마에 손을 감춘 모습과 날이 시퍼렇게 선 작두가 겹쳐 보일 적마다 마음이 아프다.

“죽으면 썩어질 일신(一身)인데 살았을 때 부지런히 일해라”고 늘 당부하신 어머니의 가르침이 내 가슴에 생생히 살아있다. 남은 여생을 부지런히 살아야 저승에 가서 어머니를 떳떳이 볼 것이 아닌가.

<김태규 울산수필가협회 회장, 전 메아리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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