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기다리며
봄날을 기다리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1.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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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거의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지난 해 태풍 ‘차바’로 열댓 가구가 침수를 당했으며 하천 주변의 전답의 상당 부분이 유실되고 자갈과 흙더미에 묻혀버렸다. 잃어버린 가축도 만만찮았다. 마을 유사 이래 가장 큰 피해였다. 하필이면 가을 수확 철이라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처음 며칠은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볼 뿐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힘을 내기 시작한 건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덕분이었다. 그분들은 수십 일 동안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망연자실해 있는 어른들을 위로하며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방 가득 쌓인 뻘을 퍼내고, 가재도구와 생활용품을 꺼내 씻고 닦고 말리고, 옷가지와 이불을 빨래하고 말리는 등 거의 모든 일에 그분들의 손이 닿았다. 마을 공터마다 생활쓰레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관의 대처도 신속했다. 장비를 동원해 무너진 전신주를 교체하고, 유실된 도로와 하천 복구는 물론 농경지까지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지난 태풍은 피해를 넘어 마을사람들에게 이웃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불행 앞에 이웃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특히 도처에서 생활하는 출향인들이 주말마다 마을로 돌아와 날이 어둡도록 일손을 거들던 모습은 진한 감동이었다.

얼마 전에는 마을회관에서 임시 반상회가 열렸는데, 논의 대상은 ‘홍수에 대한 대책 강구’였다. 시골마을 반상회치곤 좀 거창해보일 수 있지만, 지난 태풍 때 입은 피해의 원인을 분석하고 예방 방안을 찾아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였다. 마을 하천이 범람한 이유 중 하나가 상류 하천 주변에 방치된 폐목, 건축자재, 쓰레기들이 한꺼번에 떠내려 와 마을 내 교량을 막은 것이라는 데 모두 입을 모았다.

몇 가지 대책이 세워졌다. 첫째, 농경지에 부득이 농막을 지을 때는 하천 주변이나 저지대를 피한다. 둘째, 마을사람 모두가 불법 생활쓰레기 투기 감시자가 된다. 셋째, 한 달에 한 번씩 마을 하천주변 대청소를 실시한다. 넷째, 이웃마을에 피해가 발생 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는 등 네 가지가 채택되었다. 그래서일까. 마을이 눈부시게 달라지고 있다. 어딜 가나 마을사람들 손에는 무엇인가 하나씩은 들려 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이다. 때문에 쓰레기 하치장은 하루가 다르게 자꾸 불어나고 있다.

며칠 전, 조류독감 예방 차원으로 마을의 닭들이 대부분 살처분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지만 마을회관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붐빈다. 지난 태풍 때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를 잃어버려 몇 날을 몸져누웠던 최 씨 할매도 기력을 되찾은 것 같다. 수마에 떠내려가는 조립식 주택을 두 눈 뜨고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장 씨도 새 집 집들이 때는 돼지라도 잡아 고마움에 보답하겠다고 한다.

이참에 도배장판 새로 깔아 방이 더 넓어 보인다며 너스레를 떠는 노인회장, 물이 갑자기 차올라 오도 가도 못하고 마당가 감나무에 올라갔다는 황 씨 어른, 떠내려가는 씨암탉 건지려다 하마터면 물귀신 될 뻔했다는 감포댁, 흙에 묻혀 간신히 고개만 내민 벼이삭을 훑다가 설움이 복받쳐 퍼질고 앉아 펑펑 울었다는 승용이 모친도 이제 먼 지난 일처럼 되뇌며 하얗게 웃음을 내보인다. 이 얼마나 다행이며 고마운 일인가.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보나마나 올 설은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할 것이다. 더 많은 출향인들이 마을을 찾을 것이고, 담 너머 이웃에는 해 지는 줄 모르고 웃음꽃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새해에는 마을이 더 건강하고 환해질 것이다. 비온 뒤에 땅은 더욱 굳어지듯이 또 얘기치 못한 재난이 찾아와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혜로써 거뜬히 이겨낼 것이다.

상처가 아문 곳에 다시 씨가 뿌려지고 새싹이 돋고 꽃 피고 열매 맺을 것이다. 하여 올 봄은 더욱 희망으로 가득할 것이며, 여름은 풍요로 출렁거릴 것이고, 가을은 대박 날 것이라는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김종렬 시인/물시불주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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