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정명 1천년의 뿌리… 공동체의 시작
울주군 정명 1천년의 뿌리… 공동체의 시작
  • 김은혜 기자
  • 승인 2017.01.01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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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뿌리찾기 ‘자연마을 이야기’
삼한시대 진한에 속해 ‘굴아화촌’이란 촌락 형성
고려 현종 ‘울주’ 이름 첫 등장 조선시대 ‘울산군’
1914년 언양군 병합, 1962년 울주군 명칭 변경
예로부터
▲ 조선시대 언양지역.

◇ 삼한시대 진한 굴아화촌(屈阿火村)에서 시작

울주와 울산이라는 지명은 예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현재 울산시의 영역에서 언양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 범위는 같으나 고려시대에는 ‘울주’로 불리고, 조선시대에는 ‘울산군’으로 불렸다.

울주의 시작은 삼한시대에서 시작한다.

울주군은 삼한시대에는 진한에 속해 굴아화촌(屈阿火村)이라는 촌락으로 형성돼 있었다.

굴아화촌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에도 이어졌다. 신라 제5대 파사왕 때 굴아화촌에 현을 두고 남쪽에는 생서랑군(生西良郡),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 언양지방에는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고 있었다.

고려 제18대 현종(서기 1018년)에는 굴아화촌에서 울주로 이름을 바꿨는데 언양과 기장, 동래현이 속해있었다. 고려 현종 9년 시기에 ‘울주’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게 됐고, 오는 2018년은 정명 1천년이 되는 해다.

이후 조선태종 13년(서기 1413년)에 울주를 울산으로 고쳐 울산이라는 칭호가 등장했다.

울산의 옛 이름이 울주인 것이다.

고려시대 울주는 현재 언양읍과 상북·삼남·삼동면을 제외한 울산광역시와 양산시 웅상읍(서창동, 소주동, 평상동, 덕계동) 일대를 포괄하고 있다. 1914년 부·군을 정리 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 때는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했다.

1962년 2월 1일 각령 제 403호로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공포됐으며, 같은 해 6월 1일 법률 제1068호에 의해 울산군의 일부읍면이 울산시로 승격되고 울산군은 울주군으로 명칭이 변경 됐다.

그러다 1991년 1월1일 법률 제4274호로 다시 울산군으로 변경됐다가 1995년 1월1일 법률 제 4081호로 울산시·군이 통합될 때 울주구로 칭하게 됐다. 1997년 7월 15일 울산시가 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울주군으로 다시 개칭됐으며, 농소읍, 강동면이 북구로 편입되고 2읍10면의 체제로 편성됐다.

울주군은 예로부터 인심이 좋고 인정이 좋은 전통적인 농어촌 고장이었다.

온화한 기후여건으로 서생, 삼남지역의 배와 범서의 단감, 언양의 미나리, 서생 해산물괴 미역, 언양·두동의 한우불고기 등의 특산물이 명성을 얻고 있다.

 

▲ 조선시대 울주와 언양.

◇ 역사와 문화 공유한 울주 공동체

지난 11월 진행된 울주 정명 1천년 뿌리찾기 학술세미나에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이종서 교수는 ‘고려시기 울주공동체의 성립과 운영’을 발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울주’ 라는 공동체는 신라시대 말 고려시대 초기(나말여초)에서 시작했다. 나말여초 울주공동체 성립 이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다.

과거 삼국시대에는 지금의 울산시를 포괄하는 지역에 복수의 정치세력이 성립돼 있었다.

이들 각 정치세력은 고유한 역사와 문화에 기반해 지역공동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신라는 정치세력을 복속시켜 군(郡)·현(縣)으로 편제하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굴아화현은 하곡현(범서읍, 다운동, 태화동)으로, 율포현은 동진현(북구 농소·강동·송정·염포동 및 동구 일원)으로 우화현은 우풍현(웅촌)으로, 거지화현은 헌양현(언양)으로 고쳐 울주로 합속시켰다.

신라에 복속된 각 정치세력은 거주 지역의 이름을 잃고, 주권도 잃었지만 지역공동체는 해체되지 않았다. 통치권은 군권의 보유한 지방관이 행사하되 행정은 해당 지역공동체의 전통적 유력층인 촌주(村主)가 자치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신리와 같은 정복국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사포(絲浦), 항구)가 발전하면서 통합된 지역공동체가 출현했다.

대가야 통합 후 신라는 하곡현 해안에 국제항을 건설했다. 통일 후 사포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항구 주변 지역으로 인구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행정기능이 집중되면서 새로운 지역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신라말, 중앙의 통치력이 붕괴하자 각 지역은 중심지 방어를 위한 방어시설 계변성을 구축하는 등 자위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신라 정부는 하곡·동진·우풍현을 통합해 성립한 지역공동체에 흥례부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신라말 지역은 촌주층 중심의 자치행정조직이 운영됐다.

병부와 창부, 학원 등으로 구성된 ‘관부’와 당대등, 대등, 시랑, 경, 사창, 낭중 등으로 ‘관직’을 줬다. 이 시대에는 무력을 보유한 호족이 관반을 통솔해 지역을 통치했고, 대부분의 호족은 촌주층 출신이었다.

큰 규모의 호족은 핵심 지역을 근거로 주변 지역을 통할했다. 호족을 배출한 대규모 지역공동체와 이 호족의 보호를 받는 소규모 지역공동체 간 상하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국가체제 정비 후 호족의 통치력은 소멸하고, 지역공동체는 관반조직이 주도하지 않는 자치 형태로 운영된다.

하곡과 동진, 우풍의 촌주층은 연합해 나말여초 사포에 쌓은 계변성에서 관반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하곡현 출신의 호족 박윤웅이 계변성을 근거로 주변 지역을 통치했다.

▲ 경상도읍지 지도.

고려 국가체제가 안정된 뒤 박윤웅의 후손은 울주 관반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년)에 지울주사(울주방어사)를 하견해 울주는 중앙에서 인정하는 주현이 됐다. 이때 헌양(언양)과 기장, 동래를 속현으로 거느렸다.

중앙은 외관을 통해 주현을 통제하고, 주현은 외관을 통해 속현을 통할할 권리를 보장 받았다.

지울주사는 중앙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호장은 울주의 자치 행정과 군사를 담당했다.

이 같은 구조로 울주의 향리층(지방 관청의 행정실무를 처리하던 하급 관인계층)이 생겼고, 박씨와 김씨, 이씨가 호장을 담당하는 상급 향리층을 구성했다.

이들 향리층은 계변신사를 관리하고 축제를 주관했고, 향리층은 울주의 역사를 정리해 후대로 전승했다.

중앙과 지방의 협력과 조화를 추구하는 지방자치는 이 때부터 실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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