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놈의 비오리’
‘망할 놈의 비오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2.2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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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놈’. 어릴 때 공놀이 하다가 남의 집 창문을 깨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겁이 나서 친구와 같이 도망갈 때 어른들로부터 심심찮게 듣던 말이다. 그런데 ‘망할 놈의 비오리’라는 말은 의아하다. 비오리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망할 놈’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바람 끝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나뭇잎/ 사랑 끝에 끈적끈적 붙어있는 정 하나/ 벌써 나를 잊었을 님을 나는 아직도 미련/ 남한강에 찾아오는 망할 놈의 비오리/ 올라거든 혼자서 오지 님은 왜 또 몰고 와> (나진기. ‘비오리’)

가사 내용을 살펴보니 ‘망할 놈’ 소리를 들을 만하다. 사이가 소원해진 연인과 모처럼 남한강을 찾았는데 하필이면 비오리가 짝을 지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이 아니꼬웠을 것이다.

오리와 비오리는 같은 오리과(科)이지만 부리 모양과 먹이로 구분된다. 오리류는 낙곡이나 채소류를 주식으로 하지만 비오리류는 물고기를 주식으로 한다. 오리는 부리가 넓적하지만 비오리류는 부리가 가늘고 끝이 후크같이 구부러졌다. 비오리를 영어에서 ‘saw-bill duck’이라 부르는 것도 미끄럽고 빠른 물고기를 정확하게 잡기 위해 진화된 톱(saw)처럼 생긴 부리(bill) 모양에서 비롯됐다.

오리는 반잠수성이지만 비오리류는 물속으로 들어가서 먹이를 잡는 잠수성 오리로 진화했다. 비오리, 흰비오리, 바다비오리, 호사(豪奢)비오리 등 4종이 우리나라에서 관찰되며 태화강에서도 관찰된다. 비오리 암수가 무리를 지어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거나 휴식을 취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좋다. 차례로 줄지어 자맥질을 하면서 합동으로 먹이잡이를 하는 행동을 지켜보노라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울산 남구지역 ‘만남의 광장’ 앞 태화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호사비오리는 검은 눈동자, 비늘무늬의 옆구리 흰 깃털, 붉은색의 부리, 부리 끝의 노란 점, 녹색 광택의 머리, 뒤로 길게 뻗은 머리댕기 등 차림이 현란하고 색상이 화려해 마치 젊은 무당을 보는 것 같다. 이미 ‘호사(豪奢-호화롭게 사치함. luxury)’라는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여인의 자태와도 같이 아름다운 새이다.

붉은 부리 끝에 노란 점이 있는 세계적인 희귀조이자 천연기념물 448호로 지정된 호사비오리는 사람의 접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주로 태화강 하류 기수역(汽水域=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에서 관찰된다. 비오리 무리 속에서 길게 뻗은 머리댕기와 옆구리의 선명한 비늘무늬가 있으면 당연히 수컷이다. 옆구리에 비늘무늬도 없고 부리 끝에 검은 점이 있으면 암컷이다.

비오리와 관련된 지명이 있다. 부산 기장의 원앙대가 그런 사례다. 부산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바닷가에 경관이 수려하고 돌출된 곳이 원앙대(鴛鴦臺)다. 본디 이름은 오랑대(五郞臺)였다. 이름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관심 밖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랑대의 다른 이름이 원앙대라는 사실이다.

원앙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선조 36년(1603) 6월 9일자 기록에는 “본년 2일 해시에 왜선 한 척이 원앙대(鴛鴦臺) 앞바다에 들어오다가 순초병선(巡哨兵船)에 잡혀왔는데…”라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원앙진(鴛鴦陣), 원앙대(鴛鴦隊) 등의 용어도 나온다. 둘 다 원앙 무리의 행동태가 바탕이 된 용어들이다.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1572∼1631)은 기사년(1629)에 선주(善州) 부사로 부임한다. 그때 쓴 시 ‘화압(花鴨)’은 비오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어(古語)로 ‘빗올히’라 부른다. 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반쯤 빗겨 얼음 위에 몸 반은 푸른 물에, 비오리 한 쌍 날고 자맥질에 분주하구나(花鴨雙飛 浴忙). 오로지 바라기는 깊고 얕은 물속 줄지을 뿐. 모를레라 인간 세상 염량이 있는 줄을.>

선주(善州)는 현재 경북 선산이다. 선산읍은 현재도 신기리, 생곡리, 독동리 마을이 낙동강을 끼고 있다. 아마도 현주는 겨울철에 낙동강변의 길을 이용하여 선산에 부임한 것 같다. 고시(古詩)에 자주 등장하는 화압(花鴨), 문헌에 등장하는 계칙( )·계압(溪鴨)·수계(水鷄)·자원앙(紫鴛鴦) 등은 모두 비오리류의 별칭이다. 기장의 ‘원앙대’란 별칭 역시 바다비오리의 출현으로 생긴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비오리의 별칭인 ‘자원앙’에서 더 확신을 갖게 된다.

비오리는 수심이 깊어지는 밀물 때 주로 관찰된다. 간헐적으로 출현하던 비오리가 4대 강 사업 이후 내륙의 호수에서 쉽게 관찰되는 것도 깊은 수심의 영향이다.

며칠 사이 겨울 맛이 나게 기온이 내려가자 구 삼호교 아래 남구 쪽 ‘만남의 광장’ 곁 태화강 수변에 비오리의 출현이 반복되고 있다. ‘망할 놈의 비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있는 여유라도 가졌으면….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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