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殺)처분’과 동물복지
‘살(殺)처분’과 동물복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2.18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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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충북 음성군에서 처음 고개를 내민 조류독감(AI)이 한 달 사이 전국의 가금류(닭·오리) 농장을 쓰나미처럼 초토화시키고 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정부는 급기야 지난 15일 AI 위기경보 단계를 사상 처음 가장 높다는 ‘심각’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2010년 구제역 발생 이후 6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정부는 뒤늦게 ‘백신’이란 히든카드라도 꺼낼까 하고 만지작거린다지만 지금으로선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사육농가나 유통·판매·요식업 종사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서민들도 천정 모르는 달걀 값에 걱정이 태산이다. 당초 정부는 AI가 발생하면 반경 3km 이내의 가금류를 24시간 안에 살처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퍼지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이번엔 일손 부족까지 겹쳐 난감한 모양이다. ‘농정 실패’, ‘방역 후진국’ 소리를 귀 따갑게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 서슬에 참으로 아까운 생명들이 영문도 모른 채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살(殺)처분’이란 미명하에 생매장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애꿎게 죽어간 가금류 숫자는 AI가 발생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1천600만 마리를 넘어섰고, 연일 기록을 갈아치운다고 난리다. 담당자들은 밤잠 설쳐 가며 생매장 구덩이와 힘겨운 사투(死鬪)를 벌여야 하고 극심한 트라우마(Trauma)와도 싸워야 한다. 한마디로 사람 할 짓이 못 된다.

아무리 말 못하는 동물이라 해도 생매장을 당한다는 것은 잔인하고도 서글프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한 쪽 다리가 부러진 강아지를 주인공삼아 눈물, 콧물 다 짜내는 ‘TV 동물농장’ 기획자와 스텝들도 그쯤은 알만할 터이다. 하지만 그분들도 이런 때만큼은 애써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 혐오감을 주어서인가, 아니면 광고주 잃을까 두려워서인가? 구제역 창궐의 제물이 되어 구덩이로 끌려가 산 채로 묻히기 직전, 말없이 눈물 흘리는 소떼를 한 번이라도 눈여겨본 적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정부가 무릎이라도 탁 칠만한 근본대책은 하나도 내놓지 못하고 살처분에만 매달리는 관행을 나무라는 목소리는 이전부터도 있어 왔다. ‘동물사랑실천협회’는 “AI 발생 농가의 반경 3km 내 가금류를 무조건 살처분하는 것은 지나친 행정편의주의다.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예방적 살처분’을 구실삼아 강행하는 생매장은 환경오염은 물론 생명경시 풍조도 부추긴다”며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번번이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식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닭공장’이란 말까지 나오게 만든 ‘공장식 밀집사육(密集飼育)’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후진적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영국이나 유럽연합에선 가금류 한 마리가 0.75㎡를 차지하도록 비교적 넓은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러한 사육여건은 가금류의 저항력을 길러주므로 이들 나라에선 조류독감이 크게 번지는 일이 없다. 설령 조류독감이 발생하더라도 해당 농장의 가금류만 살처분하고 나머지 3km 내의 가금류는 ‘이동 제한’, ‘이동 금지’ 조치만 취한다.

이와는 달리 우리나라는 다 자란 닭이나 오리 한 마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가로, 세로 평균 15cm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업무용 A4용지 1장보다 작은 공간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같은 ‘밀집사육’은 닭이나 오리를 스트레스의 틀 속에 가두고 저항력을 떨어뜨린다. 그 때문에 돌림병이라도 발생했다 하면 대규모 확산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우리나라 가축농장의 소나 돼지가 ‘구제역’에 곧잘 걸리는 것도 밀집사육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쓰나미급 조류독감의 내습을 계기로 ‘동물복지(動物福祉)’ 쪽에도 눈길을 돌려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농림부 장관의 시원시원한 답변이라도 한 번쯤 듣고 싶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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