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 같은 ‘수첩’
깨알 같은 ‘수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2.1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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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한때 무역회사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 회사에서는 매일 퇴근 전, 다음 날의 할 일을 반드시 적어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일종의 회사 근무일지다. 뒷면에 먹지가 들어 있는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 한 장은 본인이 갖고 다른 한 장은 회사에 제출하는 것이다. 한 3년을 하고 나니 몸에 밸 정도로 습관화되었다.

그 덕에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 후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수첩’을 구입하여 지금까지 애용하고 있다. 나의 수첩 사초(?)를 40여 년 동안 쓰고 있는 셈인데 서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수첩 또는 다이어리는 말 그대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날짜별로 간단한 메모를 하지만 그것이 나아가 거창하게는 비망록이 된다. 또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한 사람이 공직에서 물러난 후 스토리식으로 집필하게 되면 회고록이다.

고사성어에 ‘총명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희미한 기록이라도 최선의 기억보다 낫다는 뜻이다. ‘언지무문행지불원’(言之無文行之不遠)도 그렇다. 아무리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다 하더라도 기록하는 사람에게는 당할 수 없다는 말이다. 독일의 격언에 ‘기억력이 좋은 머리보다 무딘 연필이 더 낫다’는 말과도 너무나 일맥상통한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메모 예찬론자를 들어보자. 억만장자 ‘워런버핏’은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글로 써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한다. 현대문명 개혁의 심볼 ‘스티브 잡스’뿐만 아니라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않은 ‘에이브러햄 링컨’도 모자 속에 종이와 연필을 넣어 다니면서 늘 메모를 했다. 하물며 ‘프란츠 슈베르트’는 악상이 떠오르면 즉시 입고 다니던 자기 옷자락에 악보를 그려 메모하지 않았던가! ‘이병철’ 회장도 정말 메모 마니아가 아니던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분야든 유명인의 메모 습관은 모두 다를 바 없다.

메모란 자기 자신을 회고하고 일상의 정확성을 위하여 적요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학습을 한 후 20분이 지나면 40%를 잊고 이틀 후에는 약 70%를 잊는다고 한다. 특히 일상적인 어휘와 형이상학적인 어휘를 외우게 하고 몇 시간이 지나 실험해보면 전자는 7, 8개, 후자는 3, 4개만 기억해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인간의 단점인지 장점인지 이율배반에 가끔 빠질 때도 있다. 19C 이태리의 시인이자 저명한 탈무드학자 ‘루자토’(S. Ruzzatto)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 그것이 꼭 현명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최근 검찰에 구속된 전직 어느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상세한 ‘수첩’이 화제다. 미국 대학에서 학위도 딴 엘리트 교수 출신으로 어느 날 갑자기 여당으로 들어가 정치를 시작하여 청와대까지 입성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최근 최순실 게이트의 공소건에 그의 수첩 내용이 잘 정리되어 큰 증거물이 된 것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의 전 과정이 상세하고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어 거짓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박 대통령에게 붙여진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말 그대로 원칙, 신뢰, 약속의 상징이지만, 통치자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깨알같이 받아썼던 ‘충신’의 수첩이 이제 본인은 물론 대통령의 범죄행위의 증거가 되는 아이러니를 빚게 된 것이다.

‘메모’란 정확성을 기하고 책임감을 가지며 계획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인간의 한계를 보완해 주기도 한다. 그것을 생활화하는 습관은 매우 중요하며 개인의 삶을 바로 세우는 나침판이 될 것이다. 부디 정국이 하루 빨리 진정되기를 바란다. 먼 훗날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선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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