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자비
1%의 자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2.0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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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이 너무 소란스럽다. 연이어 달려 나오는 부정과 의혹의 연결고리는 어디가 끝인지 알 수도 없고 어떤 부분에서는 유치하기까지 하다. 매스컴에선 연일 정책과 사람에 대한 비판의 소리밖엔 들을 수가 없다.

요즘 TV를 보면 예능과 정치평론이 주를 이루는 듯하다.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두 가지는 일맥상통한다. 개그에서 예능인들이 개그 같은 정치를 연기하는 모습은 웃다가 울 지경이다. 시쳇말로 웃프다.

주말마다 펼쳐지는 촛불시위의 진풍경을 TV로 보고 있으면 씁쓸해진다. 그러나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보고만 있는 나를 보고 옆 사람은 회색분자라 놀려댄다. 어떤 일의 전말만 보고 따지는 것은 나의 성향이 아닌 탓이다.

그 어떤 경우 사람이나 일에 있어서 말하자면 그보다 더 앞선 과거의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분명 거기에는 본태성 시발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씩 이해의 깊이가 생기기도 한다.

딸과 아들 두 아이를 키우면서 남매의 성격이 다름을 보고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매번 하게 된다. 같은 환경과 부모 밑에서 자라났지만 아이의 성향은 천성적으로 다르다. 가끔씩 어떤 일로 힘들게 할 때면 처음엔 나무라거나 타이르다가도 나중엔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부모자식간이라고 해도 온전히 부모의 생각을 따를 수 없는 개별적 성향을 존중해 줘야 한다.

옆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한 가지에 몰두하다가 더러 그르치기도 하지만 결단력이 있는 큰아이와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옆 사람의 말에도 귀 기울이면서도 의지가 조금은 아쉬운 작은아이를 보면서 사람도 세상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집스럽고 성급하기도 한 아이의 성격도 그 나름 아이의 사는 방식임을 알게 됐다. 아무리 다른 성향을 따르려 해도 해바라기의 향일성처럼 어느 사이 그 아이의 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그럴 때 나는 나름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줄 순 없어도 그의 내면을 이해해 보려는 최소한의 마음을 ‘1%의 자비’라 부른다. 그 이후의 잘잘못에 대한 결과는 당연히 당사자의 몫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속마음을 한번쯤 생각해 주는 아량이 아쉬운 요즘이다.

어릴 적 친정엄마가 어떤 경우에 더러 “얘야, 국사에도 사정이 있단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 건 왜일까.

요즘은 의식적으로 TV를 좀 멀리한 듯하다. 직업적으로 무엇을 누군가를 비판하고 비평하는 사람들이 출연하는 방송이 부담스럽다. 오래 듣고 있자면 내 몸과 마음에 송곳이 돋는 듯하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이다. 괜히 사람과 사물에 대해 불필요하고 부정적인 시선이 꽂힐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다. 가끔은 나 자신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지만 충고나 비판은 신중해야 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비나 비판도 모두 자기성찰로부터 할 수 있다는 말을 새겨들은 적이 있다. 누구를 비판할 만큼 나는 부끄럽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잘못한 이들을 그냥 절벽으로 밀어버리기보다 그런 그들의 부끄러움을 1%의 자비로 한번 쯤 돌아봐 주면서 단죄해도 늦진 않을 것이다.

이것저것을 다 떠나서 요즘은 시대가 너무 가혹하다.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들개처럼 내달리기만 하는데 그들 마음을 잠재울 따뜻한 불빛 하나가 기다려진다.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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