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다운 (step-down)’
‘스텝다운 (step-down)’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1.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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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우국(憂局)의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내자동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던 11월 12일 오후, 나라 밖 재외국민들의 동조시위 장면들도 심심찮게 영상매체의 전파를 타고 있었다. 그 순간 처음 접하는 영어가 화면을 순식간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래도 어렴풋이나마 잔상처럼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다. 그랬다. 팻말(피켓)에 적힌 영어는 분명 ‘STEP DOWN’이었다.

곧바로 민중서림의 영한사전을 훑어보았다. ‘step down’= (1) (차 따위에서) 내리다. (2) (일·지위에서) 사직[사임·은퇴]하다. 인터넷사전도 뒤적거려 보았다. ‘step down’= 단을 내려가다, ‘step down from the mound’= 마운드에서 물러나다, ‘step down from power’= 권력에서 물러나다, ‘step down from the presidency’=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다.

“아하, 그렇구나!” 반사적으로 감탄사가 튀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하야하라’는 뜻이네. 그렇다면 하야란 말뜻은? 한창 호기심 그득할 나이인 ‘미운 아홉 살’로 잠시 돌아가기로 했다.

‘하야(下野)’란? 같은 출판사의 국어사전은 풀이가 간명했다. ‘대통령 등 권력자가 직위에서 물러남’이었다. 인터넷사전은 조금 더 길었다. ‘시골로 내려간다는 뜻으로, 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말이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은 이런 때 쓰는 말일까?

‘하야’의 동의어는 영어로 ‘step down’도 되고 ‘resignation’, ‘retirement’도 되는 모양이다. ‘하야를 거부하다’=’reject retirement’, ‘국민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The citizens demanded the president step down. 누군가가 한글 문장에 대한 영어 작문을 하나 부탁했다. “오늘의 주제는 박근혜는 하야해야 하는가입니다.” 답이 즉시 돌아왔다. ‘Today’s topic is Park’s resignation.’ 또는 ‘Today’s topic is whether Park has to resign.’이라 했다.

이날 울산에서 대절버스 편으로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야당 인사가 다음날 어느 정치담론 밴드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퇴진하라! 박OO”라는 팻말을 치켜든 자신의 사진을. 그 순간, 그 뒤로 보이는 세로깃발의 글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STEP DOWN’처럼 난생처음 접하는 글귀였다. ‘손가락 혁명’!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망설이던 끝에 밴드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이냐?’고. 누군지 안 밝혀서 그런지 그의 답은 없었다. 그 대신 밴드 운영자가 정답을 흘렸다. “손가락은요, 우리처럼 SNS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제는 ‘손가락 혁명군’이 정권교체 합니다.” 아하, 그랬구나! 그것도 몰랐다니….

12일 오후 광화문과 내자동의 집회·시위 현장과 TV 스튜디오는 말의 성찬장 같았다. 무수한 말들이 무수한 촛불 빛과 함께 서울의 하늘을 수놓았다. ‘하야’, ‘퇴진’, ‘명예혁명’, “손 떼라!”, “방 빼라!”, “이게 나라냐?”, ‘우주의 기운’이란 짧은 말에서 ‘무자격 토털 솔루션(→최순실)’, “1%가 99%를 우롱했다”, “닭 잡아야 새벽 온다!”라는 조금 더 긴 말까지…. ‘최씨 일가 저격수’ 격인 안민석 국회의원도 독설을 남겼다. “최순실 일당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족사기단”이라고 말이다.

TV 해설에 참여한 패널들도 신조어(新造語) 출현에 일조했다. 이분들의 공통 멘트는 ‘삼무(三無)집회’ ‘성숙한 시위문화’였다. ‘삼무(三無’란 물대포와 쇠파이프, 쓰레기를 의미했다.

<김정주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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