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길과 계변성
성곽길과 계변성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1.0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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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가 지역에 있는 6개의 성(城)을 연결하는 성곽길을 조성하기로 했다.

지역의 역사유적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중구는 6개의 성을 병영성을 비롯해 울산읍성, 고읍성, 울산왜성, 계변성, 반구동토성이라고 설명했다. 계변성과 반구동토성을 별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계변성의 위치를 두고 아직 일치된 학설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계변성(戒邊城)은 나말여초(羅末麗初) 울산 지역 실력자였던 박윤웅(朴允雄)의 세력근거지이자 흥려부(興麗府)의 치소였다.

흥려부는 울산박씨 시조인 박윤웅이 930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하고 그 공로로 받은 고을 이름이다. 이때의 흥려부는 당시 동진현(강동 일대)과 하곡현(울산 중심부), 동안현(서생 일대), 우풍현(웅촌·온양·온산 일대) 임관군(모화 일대)을 모두 합친 것으로 울주와 울산으로 이어왔던 지역이다. 1906년 울산에 병합된 두북면(지금의 두동면과 두서면) 그리고 1914년 병합된 언양군(지금의 언양읍과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지역을 제외한 울산광역시 면적 대부분이 포함된다. 흥려부는 19세기까지의 울산 지역 대부분이 하나의 고을로 묶여진 최초의 행정단위인 셈이어서 지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학계에서는 계변성의 위치에 대해 반구동의 서원산이라는 주장과 학성동의 학성산이라는 주장이 서로 엇갈리게 나오고 있다.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한삼건 교수는 계변성의 위치를 서원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울산성곽연구회 이창업 박사는 학성산에 계변성이 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 교수는 반구동 토성과 항구유적 발굴 조사 결과를 주장의 주근거로 삼고 있다. 이 박사는 고문헌과 고지도의 내용을 토대로 주장을 펴고 있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한 교수는 고문헌의 비교분석과 문헌비평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이 박사는 반구동 유적의 발굴 조사 결과를 종합해도 서원산에 계변성이 있었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구는 성곽길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계변성의 위치를 학성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구가 이창업 박사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한삼건 교수의 주장은 2013년 발간된 책 ‘울산 중구 600년 도시를 걷다’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이창업 박사의 주장은 2012년 발간된 책 ‘학성길에서 울산을 만나다’에 실려 있다.

두 책은 모두 울산시 중구의 후원으로 발간됐다. 그럼에도 중구가 계변성의 위치를 이 박사의 주장만 수용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서원산은 지금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학성산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곳이다.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실시할 수 있는 곳은 학성산뿐이다. 학성산 지역의 학술발굴조사가 시급한 것이다.

중구가 추진하고 있는 성곽길 조성사업은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사업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아직 불분명한 계변성의 위치를 학성산으로 비정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서원산은 이미 아파트가 들어섰다. 반구동 항구유적은 아파트 건설공사 과정에서 발견됐지만 아파트 건설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울산의 귀중한 역사유적을 그렇게 잃어버렸다. 개발논리에 모든 것이 묻혔던 시기의 뼈아픈 기억이다. 신중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계변성의 위치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서로 다른 학설만 존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정을 생략하고 한 쪽의 주장만 수용할 이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냥 현재의 연구성과 그대로 소개해도 성곽길 조성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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