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의 울산
2008년 가을의 울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10.1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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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이 짙어 가면서 사람들의 얼굴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 올 불행을 예견하는 듯 애써 짓는 미소 마저도 밝지 않았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어기고 ‘돈 버는 재주’에만 몰입했던 인간들에게 이번 겨울은 혹독할 것임을 예고하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십 원만 싸도 고객이 몰리던 주유소에 1백 원씩 하락된 가격표시대가 걸려 있어도 찾아드는 차량들은 뜸하기만 했다. IMF 시절에도 설치던 희희낙락 군상(群像)들이 그즈음 들어 자연스럽게 조용해진 것 또한 그 가을의 특징 중 하나였다. 은행권의 대출금 회수가 사람을 옥죄는 사슬이 된 이래 이번처럼 ‘서서히 온몸을 조아들긴 처음’이라고들 투덜댔다.

미국의 달러 가치가 땅에 떨어져 철벅거릴 때마다 울산거리 곳곳에도 암울함이 소리 없이 깔리긴 마찬가지였다. 주식, 펀드로 기고만장했던 투자자들이 죽는 시늉을 하는 동안 삼산 유흥가 주점들도 일찍 문 닫는 연습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자약 할 수 있는 인간들의 여유는 가식이라 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더 이상 해결 방법이 없음을 눈치 챈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불안을 포기로 바꾸는 시도를 한 것이 계절 탓 이었을까.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방법이 확연히 달라진 것만 봐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길가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보고 ‘청소행정 부재’를 비난하던 인간들이 짧게 한마디 욕설만 퍼붓고 사라진단 자체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온갖 위선과 가식을 동원해 봤지만 자신들이 저지른 결과에 대해 감내해야 할 고초들은 목전에 와 닿기 시작했다. 돈의 기준에 맞춰 생산을 저울질 했던 근로자들은 다가올 겨울을 걱정해야 했고 한여름 밤의 포도(鋪道)를 촛불로 덮었던 시위자들은 차가운 현실 앞에 몸을 웅크리는 인간 본연의 자세를 그때서야 보였다. 먹거리 하나로 온 세상을 뒤집어 엎어 놨던 달변가들은 숨을 죽인 채 계절의 판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작금의 비관(悲觀) 원인 제공자 이건만 결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이중성은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비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는 기술을 발휘했다. 미국 뉴욕 월가(wall street)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강대국들의 횡포에 국내 경기 침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도 잊지 않았다. 세계 유가폭등 배후에 미국의 거대기업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점령으로 인한 전쟁비용 과다 지출 때문에 ‘애꿎은 약소국가만 죽게 됐다’고 미국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그들 내부에서부터 달라져 있었다. 독설을 퍼붓는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고 강대국을 물고 늘어지기엔 저질러 놓은 결과가 더 심각함을 내심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약간의 절제와 겸손, 양보가 눈에 띄긴 했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백화점 VIP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겸연쩍게 생각하는 예의, 명품 코너를 기웃거리는 여성들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조금만 더 빨리 이뤄졌으면 좋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 조그만 양식마저도 이젠 ‘위기에 몰린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물러서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미 엎질러 진 물을 다시 퍼 담을 수도 없고 ‘일을 저지른 사람’들의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해 가을은 무기력하게 추운 겨울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 정종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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