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마력
시간의 마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1.0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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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 고운 빛깔로 물들어가는 산천이 아름답다. 그리고 고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포의 지진과 처참했던 태풍의 뒤끝으로 흩어져버린 시간과 공간의 귀퉁이라도 그나마 맞추어보려고 사람들은 발버둥을 쳤었다. 그런데 자연의 위력에 아연실색하던 시간들이 차츰 옅어질 쯤까지도 나는 태풍의 위력보다 조금 더 전에 느꼈던 지진의 공포가 더 큰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 개인적인 체험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한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땅의 울림이 심신에 전해지던 몇 번의 기억은 내게 예상치 못한 트라우마로 남았었다.

누워서 잠을 청할 때면 파도 위에 몸을 누인 듯 등 밑으로 어지러운 물결이 출렁댔다. 숨소리에도 흔들리는 내 몸과 정신의 반응에 불안해지곤 했다. 계속되는 불면의 밤이 두려웠다. 그러나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진과 태풍의 상처를 해결해줄 수 있었던 것은 행정적인 지원과 많은 인력과 따뜻한 마음이었겠지만 그 속엔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묘약이 함께 있었다.

간간이 여진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무작정 해안도로를 따라 길을 나섰다.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이견대를 거쳐 도착한 곳은 감은사지 절터였다. 절터 주변의 들녘엔 벌써 황금물결이 일렁이고 있었고 고요 속에 잠긴 절터는 천지에 무엇이 울렸는지 지나갔는지 모르는 듯 평온했다. 이따금 지나는 바람이 절터의 안부를 물었다. 계단에 올라서니 두 기의 삼층석탑이 건재하다. 볼 때마다 미더운 탑이다. 금강터도 너끈히 땅속의 반란을 잘 견뎌주고 있었다. 왜 혼자만 힘든 것처럼 응석을 부렸나 싶기도 했다.

의연히 세월을 견뎌 이제는 온전한 자연이 된 그런 존재들에게서 위안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또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 좋게도 시골 오일장을 만났다. 촌부들이 올망졸망 채소며 물건들을 내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이 고장에 오일장이 서는 줄도 몰랐거니와 알 리도 만무했다. 오랜만에 보는 시골 장터의 풍경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아주 오랜 예전으로 돌려놓는 신비가 있었다.

어릴 적 외할머니를 따라 가곤 했던 시골 장터와 돌아가던 길이 생각났다. 외할머니가 사주셨던 감홍색 골덴 원피스의 아련한 색감은 노을을 볼 때마다 능소화꽃을 볼 때마다 아직도 생각난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장터를 한 바퀴 뒤지듯 돌다 채소 한 단과 소국 두 분 그리고 도토리묵 한 모를 샀다. 그 저녁엔 식탁에 놓인 국화 향을 맡으며 가족과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씩으로 기분 좋은 저녁이 될 것 같았다. 혹 점심때가 맞으면 장터 할머니가 미는 칼국수 한 그릇으로 요기를 하기도 하는데 그 맛은 왜 도심의 국수맛과는 다른 걸까.

그 뒤부턴 장날을 머릿속으로 꼽고 굳이 살 물건이 없어도 장돌뱅이처럼 어김없이 그 시골장엘 간다. 그곳에는 시간을 예민하게 마주하지 않으면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안하고 순박한 얼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얼굴엔 지난 공포의 그림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시간을 마주보며 살기도 하고 시간을 잊은 듯 살아가기도 한다. 한때 나는 시간을 마주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조바심 나게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시간 속 물상만을 보려고 한다. 천여 년의 시간을 간직하고도 여전히 대종천을 바라보며 묵묵히 터를 지키고 서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처럼. 푸성귀를 어루만지는 장터의 순박한 촌부처럼.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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