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帝國)과 민국(民國)
제국(帝國)과 민국(民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0.2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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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황제에게로 한 통의 전보가 당도했다. 발신인은 일본에 있던 황태자 영친왕이었다. 그날 아침에 만주 하얼빈역에서 발생한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전문은 순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실록에 따르면 영친왕은 “이토 태사(太師)가 오늘 오전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에 의해 피살됐으니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며 “황실에서 일본 황실에 직접 전보를 보내 위문하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라 사람의 흉악한 손’은 바로 안중근 의사를 말한다. 한문 원문에는 ‘아국인흉수(我國人凶手)’라고 표현돼 있다.

황실도 일본 황실로 바로 전문을 보낸다. 전문의 내용은 “오늘 이토 공작이 흉악한 역도에게 화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삼가 똑같은 마음으로 지극한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이다. 이번에는 ‘흉악한 역도’이다. 한문으로는 ‘흉도(凶徒)’였다. 이날 황실은 이토의 부인에게도 전보를 보내 위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4월에 이왕직의 주관하에 일본인의 관점으로 편찬됐기 때문에 고종실록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운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된 사실(史實)은 부정할 수 없다.

대한제국 황실의 후속조치는 계속 이어진다. 황실은 즉각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이토의 시신이 안치된 만주 대련(大連)으로 보내 위문했다. 그리고 황비의 탄생일 잔치를 정지시켰다. 또 사흘간 조회와 백성들의 가무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이토에게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추증했다. 동경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조위금과 함께 황제의 동생 의친왕을 조문사절로 파견했다. 일본에 있는 영친왕에게는 석 달 동안 상복을 입도록 했다.

일본에서 국장으로 치러진 이토의 장례일에는 대한제국 황족과 궁내관 그리고 내각의 대신들이 장충단에서 추도회를 설행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이 나라 백성들의 울분을 발현했던 쾌거였다. 안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토를 죽인 이유를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토는 당시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일본 정부 최고 실력자였다. 추밀원은 일본 덴노의 자문기관이었다. 앞서 그는 초대 조선통감을 지내며 한일합방을 주도한 인물이다.

안 의사는 그런 이토에게 일본의 한국 침탈 야욕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의사의 거사는 우리의 항일 의병들의 투쟁의지에 기름을 부었고 중국인들까지도 크게 고무시켰다. 지금까지도 우리 항일독립운동사의 빛나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한제국 황실은 민심을 읽지 못했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는 황실과 신료들의 기득권 유지가 급선무였다.

안 의사의 거사 이후 일 년도 못 된 이듬해 8월 29일 융희제는 일본정부에 통치권을 찬탈당했다. 순종실록 이 날 부분에는 융희제의 조서(詔書)가 실려 있다. 조서는 국한문혼용체로 쓰여 있다. 내용은 “짐이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해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해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해 행복을 함께 받으라”이다. 황실의 적통이었던 영친왕은 35년후 광복을 맞은 조국에 즉시 돌아오지 못했다. 해방정국에 영친왕의 귀환과 황실복원을 주창하는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찍이 1919년 중국 상하이에 건립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한심한 황실을 그때부터 포기했던 것이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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